다정이란 이름으로 中
다정이란 이름으로
매리엇
5
오랜만에 외식할까. 저녁 여덟시쯤 종인의 집으로 퇴근한 백현이 물었다. 현관문을 열었는데 들어오지 않고 문턱에 기대서 있었다. 안 들어오고 뭐해? 의아한 눈으로 묻자 나가자. 말했다. 일정하진 않지만 백현이 그렇게 권유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주기가 있다. 일정 기간 이상 집에만 있게 두지 않을 것.
하얀 국물에 담군 샤브샤브를 먹고 나오는 길에는 뱃속이 따뜻했다. 뜨거운 거 먹었으니까 시원한 것도 먹어야지. 하며 입에 아이스크림을 푹 물려준다. 사실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지만. 아이스크림을 돌돌 녹여먹으며 주차해 놓은 데까지 걷는 길에는 백현이 사진 얘기를 했다. 가을에 아마추어 사진전 한다던데, 나도 하나 낼까? 어떻게 생각해. 제 의견을 묻는 말에 종인은 끄트머리가 녹아 동그랗게 된 아이스크림을 깨물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
“사진 그만뒀다구 하지 않았어?”
“뭐... 너만큼은 아니고. 하긴 하는데.”
무심히 하는 말에 그만 입이 벌어졌다. 종인은 졸업을 하고도 꽤나 열심히 취미를 유지한 편이었다. 도훈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건지도 몰랐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에는 사진을 직접 인화하려고 만든 암실이 있었다. 단독으로 서재가 없는 대신이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방음벽을 설치하고라도 작업실을 만드는 것처럼, 서재를 희생하면서 제일 공들여 만든 방이었다. 그 네모진 공간 안에 모든 추억이 다 갇혀있다. 하지만 백현은 정말로 다 그만둬 버린 줄 알았는데. 기뻤다. 아직 그 때의 우리를 만든 공통분모를 백현이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활짝 웃었나보다. 백현이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참나.”
“......?”
“그렇게 웃고.”
사이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이렇게 백현과 분위기가 자연스레 좋을 때면 종인은 걱정이 됐다. 거절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될 것 같아서. 백현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혹시 정말 실망하지 않을지도 다 걱정이 돼서. 그런 생각에 멍하니 보고 있자 눈앞으로 훅 쳐들어온 손이 딱밤을 먹인다.
“가자.”
“.......”
벌써 잊으면, 안 될 것 같다.
늘상 그런 습관처럼 바지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앞서 걷는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가 원래부터 다정한 성격이란 건, 그거야말로 제 편의적인 생각일까.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사랑이 아니라면,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도.
종인은 원래부터 혼자 자지 못하거나, 어둠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두컴컴한 집에 혼자 들어가기를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언젠가부터는 늘 바로 현관문 앞까지 바래다주는 것이 데려다준다는 것의 정의였다.
현관문 앞에 나란히 선 백현이 문 쪽으로 턱짓을 한다.
“...그냥 가게?”
“어. 적당히 들어가려고. 아침에 일찍 나가야 되기도 하고.”
“들어왔다 가.”
어리광 아닌 어리광에 백현이 피식 웃는다. 그가 곤란할 때 짓는 웃음. 벌써 자정이 넘었다. 사방이 고요하고 모두가 잠든 시간. 이 조용하고 말썽 없는 동네엔 몇몇의 열정만이 깨어있겠지.
“자신 없는데.”
“........”
“오늘은.”
무슨 자신? 하고 물어서도 안 된다는 걸.
“간다.”
얼른 백현의 옷깃을 붙잡았다. 급한 맘에 일단 잡긴 잡았는데, 자신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뻔히 알아들었으면서 못 알은 체 하긴 면목이 없어서. 핑계가 없어서, 꾹 붙잡고 아무 말을 못하니 백현이 못 이기고 그만 소리 내 웃어버린다. 웃음소리가 시원하다.
“진짜 너무하네- 김종인. 나보고 잠만 재우고 가라는 거지?”
“.......”
“그래. 들어가자.”
하고 먼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연다.
잠에서 문득 깨었을 때, 백현은 제 배와 가슴 바로 옆 어디쯤에 어중간하게 엎드려 잠들어있었다. 종인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어쩐지. 잠자리가 영 사납더라니. 그리고 어둠속에서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팔을 괴고 엎드려 새우잠에 든 얼굴을. ‘자고 가.’라고 말했으면. 그가 다르게 받아들였을까.
조금 지켜보다 조심조심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앞으로 흘러내려 눈을 가린 앞머리를 쓸어 넘긴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짧은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조심해서 한다고 했는데, 너무 여러 번 만졌나보다. 백현이 부스스 눈을 뜬다. 너무 가깝다. 형... 하고 부르기도 전에 입술이 집어 먹혔다. 입속으로 혀가 들어온다. 숨이 뜨거웠다. 키스하며 제 위로 올라온다. 티셔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손에 자연스레 허리가 들렸다. 옷 위로 아래가 맞붙는다. 가운데가 뜨거웠다. 온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백현이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혀엉.... 그가 입은 셔츠의 가슴팍을 꼭 쥐자 소리가 안으로 삼켜질 만큼 키스했다. 맨 허리를 간지럽히는 손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망울진 눈으로 올려다보자, 마주 내려다보는 눈이 다정하고 뜨거웠다. 그리고 천천히 내려가는 입술, 손. 제 호흡을 달뜨게 하기 시작한다. 형, 안 돼. 정말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갑자기 설움이 복받쳤다. 막연한 두려움이 종인을 거대하게 짓눌렀다.
백현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었더라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테다. 문이 닫힌다. 무거운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종인 혼자 남았다. 잠드는 그 때까지가 가장 무섭다는 거, 놓지 않아주겠다고 말했으면서.
6
“오랜만에 왔다 형. 답장도 느리게 하구.”
사들고 온 걸 식탁위에 풀어놓던 백현이 힐끔 눈을 마주치며 멋쩍게 웃는다.
“그러게. 바빴어. 밥은. 먹었어?”
“먹었을 리가 없잖아....”
정말 어린애처럼 굴기 싫은데.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왔다. 입이 이만큼 쭉.
“앨범 녹음 저번에 마지막 곡 했다며. 이제 마무리 단곈 줄 알았는데... 계속 바쁘네.”
“아... 저번에 걔들 말고. 그것도 있는데, 다른 그룹. 거기 센터 하는 애를 이번에 솔로를 내보내라고 해서. 요즘 정신이 너무 없다.”
“나 내일 강릉 가려고 하는데....”
백현의 손이 잠시 멈추고 반사적으로 묻는다.
“아... 왜?”
“.......”
“.......”
“도훈이형 생일이잖아.”
“아.”
“기억 못 한 거지.”
이 서운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체 뭐라고 이름 붙여야할까. 안 그러려고 해도, 벌써 속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시간... 안 되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백현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짚는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종인아. 진짜 미안한데, 내가 생각을 못했어. 주말에 가자. 시간 비워놓을게.”
“아냐. 나 혼자라도 갔다 올래.”
“...너 운전도 못하잖아.”
“버스타고 가지 뭐. 아님 운전 해봐도 되구.”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고집 부리지 말고. 토요일에 데려다줄 테니까 그 때 가. 하루 이틀 늦는다고,”
“고작 두 번째 생일인데 벌써 잊어버렸다고 하면 너무하잖아. 나였으면 서운할 거 같아. 나는 당일에 갈게.”
그가 한숨을 쉰다. 한숨 쉬는 소릴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서운함이 몇 겹이 겹친다. 백현은, 제가 말도 안 되는 뗑깡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종인도 그쯤은 다 안다.
“아무리 그런 거 아니라고 해도 형은 나랑 다르잖아. 나 이해 못하잖아.”
“그래.”
“.......”
“이해 못 해. 이해 못하겠어.”
하지만 그가 그렇게 냉정하게 긍정해버릴 줄은 몰랐으니까.
“김도훈 문제만 나오면 내가 어디까지 너한테 잘못한 사람인 건지 이젠 알지도 못하겠어.”
“.......”
“나라고 걔가 죽길 바란 거 아냐. 꿈도 꿔본 적 없어.”
“.......”
“그냥 내 감정이야. 너 좋아했고, 그거랑 상관없이 김도훈이 죽었고. 근데 난,”
종인은 여전히 죽는다는 말만으로도 불안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고작 그 정도였다. 갈피를 못 잡겠다. 이렇게 냉담한 백현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른다.
“여전히 좋아해. 그게 다야.”
“.......”
“너도 여전히 김도훈의 애인이겠지.”
다음 말을 봐주지 않을 것 같은 직설적인 시선도.
“항상 생각해. 그 때 내가 먼저 고백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후회해?”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나왔다. 이미 터져버린 감정을 어쩔 줄 몰라서. 백현은 후회하고 있다.서러웠다. 그런 감정은 논리적이지 않다. 언제는 기다린다면서. 기다릴 수 있다면서. 원망할 자격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원망했다.
“어, 후회해. 처음부터 내가 사귈 걸. 김도훈한테 기회도 주지 말 걸.”
“.......”
“그딴 의리가 뭐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어떻게 죽었는데! 얼마나,”
얼마나 비참하고, 허망하게. 종인은 백현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빨개지기 시작한 눈이 아팠다. 눈알이 뜨겁다. 마주본 백현의 얼굴이 너무 아프게 일그러져 있어서,
“나한테도 조금은, 너그러워져봐. 너는 항상 나한테만 그렇게 엄격하고 잔인하지.”
결국 먼저 눈물이 터졌다. 그러지 않으면 백현이 울어버릴까봐 두려워서 먼저 울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지쳤다고 말하고 있는 얼굴이 미웠다. 그렇게 좋은 남자인 척, 너그러운 사람인 척 사람 맘 다 흔들어놓고. 기대하게 했으면서. 떨어지는 눈물에 백현이 말을 멈춘다. 입을 꾹 다물고 매끈한 목울대가 몇 번이나 말없이 일렁거렸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럴 때가 있다. 잔인한 상대 앞에서 너의 잔인함을 원망하기보다 내가 너를 사랑한 방식이 잘못됐었나 하고 후회하게 될 때.
많이 울겠지. 처음으로 한 번만, 모른 척 하고 싶다.
7
결국 도훈에겐 가지 못했다. 종인은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도훈의 사인이 교통사고였기 때문에, 그 이후로 처박아둔 차에 기어이 앉아도 봤지만 영락없이 실패였다. 운전도 못 하겠고, 백현과 싸우고는 펑펑 우느라 체력이 다 소진돼서 그럴 힘도 없었다. 늘 그가 바래다줬지만, 옆에라도 앉아있었다면 좀 용기를 낼 수도 있었을텐데. 언제부터 이렇게 백현 없인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됐지. 심지어 자각도 크게 없었다는 사실이 더 황당했다. 아니다. 그냥, 백현 없이 혼자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마주한 백현은 건조한 얼굴이었다. 원래 그가 가진 얼굴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종인 자신은 잘 보지 못한 그 얼굴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형.”
“.......”
“진짜 화났구나.”
그렇게 묻자 선선히 머리를 쓰다듬는다. 안심해도 되는 걸까.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니 덧붙인다.
“너한테 화내는 거 아냐. 그냥 죽은 사람한테 질투나 하고 있는 거 한심하니까. 그래서 그러는 거지.”
“........”
“그만 하자, 종인아. 너도 할 만큼 했어.”
힘든 거 알면서 계속 밀어붙여서, 진짜 미안해. 하고 사과하며 한 번 더 머리를 아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가슴에 쿵 바위라도 떨어뜨린 것 같다. 역시 안심하면 안 됐었다. 그의 건조한 얼굴은 잘못 본 것이 아니라, 그가 드디어 지쳤기 때문이었고. 미안하다는 말을, 그가 결국 먼저 한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또 같은 패턴.
8
종인은 세훈과는 과 동기다. 같은 사진부 멤버이자, 유일한 같은 과 동기. 1학년 1학기에 입부한 종인보다 꼭 한 학기 늦게 들어왔다. 종인은 주로 백현, 도훈과 사진부 활동에 더 비중을 뒀기 때문에 과 동기 중에 이때까지 주기적으로 얼굴을 보는 건 거의 세훈 정도가 유일했다. 세훈은 별로 관심 안 둔다는 듯 시니컬하게 말하곤 하는 것에 비해 이모저모 충실한 편이라 저 말고도 과에 만나는 사람이 아직도 꽤나 있는 것 같다. 그러느라 내내 붙어 다닌 정도는 아니지만 종인의 학창시절, 사진부 기억을 구성하는 핵심멤버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제법 편해서 그래도 자주 봤었는데, 이번은 꽤 오랜만이다. 암묵적으로라면 몰라도 도훈과 연인 사이였다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요즘 백현이형이랑은 잘 지내?”
“어....”
“잘 좀 지내. 대체 언제 받아주려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세훈이 툭 던져놓듯이 말한다. 종인은 제 음료를 마시다 말고 깜짝 놀라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어? 너, 알고 있었어?”
“우리 그때 멤버 중에 백현이형이 너 좋아한 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렇게 티 나게 멀어졌는데. 뭐... 눈치 없는 사람들은 잘 몰랐을 수도 있으려나.”
세훈은 표정변화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별로 자세히 말하진 않았어도 세훈은 돌아가는 사정을 대강은 다 아는 눈치였다. 예전에도, 지금도. 물론 백현과도 계속 왕래를 하는 사이인 것도 있겠지만. 하지만 언제 저렇게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갖게 됐지. 그러고 보면 어느 틈에 저렇게 사약 같이 진한 아메리카노가 익숙하게 잘 어울리는 남자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틀 안에 갇혀서, 자라지 않겠다고 고집을 쓰고 있는 건 저 혼자일까. 저도 모르게 머그컵 위를 빙빙 손으로 매만졌다.
“어차피 다 늦은 얘기긴 한데. 도훈이형도 그렇게 되고. ...난 솔직히 니가 도훈이형이랑 사귄다고 했을 때 좀 놀랐다.”
“.......”
“어차피 니가 남자한테 관심이 있을 때 얘기였지만. 사귀어도 백현이형이랑 사귈 줄 알았는데.”
도훈도 다 알고 그랬던 건 아닐까. 모른 척 했던 건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정말 백현이 먼저 제게 말했다면.
정말 제가 백현을 그렇게나 소모시켰던 걸까.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만조금만 하면서 더 응석을 부리던 것이 백현은 물론이고, 저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밀어낼 줄 몰랐다. 백현이 다 소모되어 사라진다면, 아니 그의 다정이 다른 사람을 향하게 된다면. 그런 상상을 하고 초조해졌다. 안 돼. 그의 다정이 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느니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런 감정이었다. 종인이 그에게 가진 것. 욕심은.
9
앞에서 만난 다른 직원의 말로는 아직 녹음작업 중이라고 해서 살짝 조심해서 안을 들여다봤다. 저도 모르게 발끝을 들고 안을 살폈을 땐, 다행히 녹음중은 아니었고 가수가 백현 옆으로 나와 있었다. 저번의 그, 거의 울 것 같았던 여자 아이돌이다. 종인도 잘은 모르지만 백현네 회사 아이돌이라 대충은 안다. 회사에서 제일 잘 나가는, 밀어주는 여자 아이돌 그룹의 센터인 멤버. 언뜻 봐도 정말 예쁘다. 눈이 바비인형 같이 크고, 틴트를 진하게 바른 입술이 앵두처럼 새빨갛다.
“오빠 나랑 잘래요?”
잠시 들어가서 아는 척이나 하려던 종인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펄쩍 놀라 그만 그 자리에 섰다. 기겁할 노릇이었다. 정말 저런 대사를 듣게 되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었고, 그 다음으로 굳이 보지 않아도 살벌한 백현의 목소리가 들린다. 윤주희.
“너 맞을래?”
말투가 까칠하다. 어쨌건 이십대 초반부터 그간의 백현을 알아온 경험으로, 저건 정말 아주 화났을 때만 나오는 소린데.
“너 누가 그렇게 싸가지 없는 말 하라고 가르쳤냐.”
“.......”
“너 어른한테 나랑 잘래요 소리가 나와?”
“오빠....”
“그런 소리할 거면 앞으로 선생님이라고 불러. 오빠 소리 하지 말고.”
비쩍 마른 여자애가 옆에 잔뜩 몸에 힘이 들어가 주먹을 꾹 말아 쥐고 서있는데도 아는 척도 안 한다. 콧잔등에 흘러내린 테가 얇은 작업용 안경을 습관적으로 한 번 밀어올리곤, 악보에 시선을 박고 제 할 말만 한다. 물론 만약 이런 상황이 왔을 때 백현이 상대도 안 해줄 쪽일 거란 생각은 했지만, 저 정도로 무시를 할 줄은 몰랐다.
“주희. 그런 생각으로 녹음실 따로 나오는 거면, 다음부턴 나머지 애들이랑 같이 와라.”
“왜... 줘도 못 먹어요? 나 국민 여동생 소리 듣는 거 몰라요? 나랑 자고 싶어서 달려드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저번에 다른 프로듀서님이랑 작곡가 오빠는 나 존나 이쁘다고 나랑 자보고 싶댔거든요? 근데 내가 튕겼는데 씨...”
“어떤 새끼니. 도대체.”
험악한 투로 일갈한다. 그가 보고 있던 걸 그대로 덮어버리곤 여자앨 그제야 돌아다본다. 최근에 저런 상태가 많이 되어봐서 아는데, 복받쳐서 딱 한 번만 더 찌르면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상태다.
“오빠는 내가 알아서 주겠다는데... 내가 딴사람 아니구 오빠랑 자겠다는데 근데도...”
“오빠 아니고 선생님.”
너무해. 으아앙. 아무리 되바라진 소리를 당돌하게 해도 어린애는 어린애고, 아마 거절 같은 건 당해본 적이 없을 여자애가 인형 같은 눈으로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런데도 백현은 눈 하나 깜짝 안한다.
“그러니까, 내가 널 데리고 자면 어떻게 되겠냐. 어? 너 몇 살이야. 열일곱이지. 니 입으로 니가 국민 여동생이라며. 내가 국민 여동생을 건드리면 어떡해? 못하는 소리가 없다.”
눈물을 참을 생각도 않고 보란 듯이 뚝뚝뚝뚝 흘려버리는 여자애를 보고는 한숨을 쉰 백현이 그제야 선심 쓰듯 말했다.
“더 크면 와. 그 때도 나 좋으면 생각해볼게.”
그리고 그 말에는, 듣고 있던 종인이 어이가 없었다. 솔직히 기분이 좀 상할 뻔 했지만, 한두 번 당해보고 한두 번 거절해본 것도 아닌 솜씨라 그러려니 하려고 했는데 저런 말을 하고.
“앞뒤 없이 막 덤비지 말고.”
“약속했어요. 나 그때 진짜 다시 고백한다. 안 받아주기 없어요. 진짜 말 바꾸면 남자도 아니다.”
“그 때 가서 무슨 아이돌오빠 소개해달라고 징징대지나 않으면.”
어이구. 백현이 아저씨 같은 투를 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 세우기도 포기했는지 금세 기분이 풀린 여자애가 코끝은 빨개진 채로 반색을 하며 달싹 붙는다. 하긴, 저번에 변백현한테 그렇게 호되게 당하는 걸 봤는데 고백씩이나 하고 있는 것만 봐도 견적은 나오지만.
“오빠.”
“선생님이랬다. 너 발랑 까진 소리 한 벌이야.”
“오빠아.”
“그래, 알았으니까.”
어느 새 백현의 말투가 누그러져 있다. 와 진짜. 생각해보긴 뭘 생각해 봐?
“좋냐.”
종인이 녹음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부루퉁한 투로 시비부터 거는데도 캐치를 못하고 멀건 얼굴로 돌아본다.
“언제 왔어?”
종인에게 아는 체를 하며 안경을 벗어 내려놨다. 금테 안경. 이상하게 안경을 쓰면 더 늙어보이지가 않고 오히려 더 인상이 선명하고 날카롭고 그래 보인다. 요즘 살이 더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어린 여자애들이 오빠 오빠하구. 형은 직장 동료가 다 그런 애들이라 좋겠다.”
“아아... 무슨.”
하고 피식 웃는다.
“다 봤거든요. 튕기면서 엄하고 멋진 선생님인 척도 해보구. 입 찢어지겠던데 뭐.”
원래대로라면 질투해? 하면서 깐족거려올 때도 됐는데, 백현은 그냥 웃는 둥 마는 둥 하고 만다.
“나 포기하지 마. 형.”
종인은 늘 백현을 마주할 때마다 두려웠다. 항상 조금 느슨해지려다가도 방심하고 있으면 가슴을 콱 틀어막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이 막연하고 바닥이 없는 두려움의 정체를 안다.
“.......”
“다른 사람 좋아하지 마.”
그를, 잊게 될까봐.
“외롭단 말이야. 나 형이 필요해.”
제가 온전히 행복해져 버릴까봐, 그게 두려웠다.
마치 아까 백현의 앞에서 호기롭게 당돌한 말이나 던져놓고는 실은 잔뜩 얼어 서있었던 그 애처럼, 종인은 꼭 그 애의 처지가 되어 여기 서있다. 담담한 표정이나 입으며 적당히 대하던 백현이 물끄러미 저를 돌아본다. 제 얼굴 표정을 찬찬히 읽어내는 눈.
키스 정도는... 해도 되는 게 아닐까. 종인은 눈을 꾹 감고 부딪쳤다. 의자에 앉아있던 백현이 약간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무게를 받아내는 손의 모양이 엉거주춤하다. 이내 벌어지는 입술을 열고 들어가 입안에 마치 단 꿀이라도 고인 것처럼 입술과 혀를 빨았다. 입술이 잠시 떨어지자 숨을 내쉬는 서로의 입술이 반들반들했다. 이렇게 나만 생각하게 될까봐. 형이, 옆에 있으면. 숨을 고르는 백현과 눈이 마주쳤다.
“형....”
“...진짜 못된 새끼야 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 뒤통수를 다시 세게 당겨온다. 그렇게 녹음실 안에서 한참동안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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