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미 소프틀리 3
킬링 미 소프틀리
매리엇
8
문득 생각 날 때면 막연히 답답하고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종인으로선 도저히 백현의 속을 알 수 없었다. 그 날 자연스럽게 번호를 교환했지만 그 뿐이다. 달라질 건 없었다. 종인도 인정했다. 이건 아직까지 실연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고,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도 스스로에게조차 민망했다. 그렇지만 화가 났다. 당신도 나도 어린애가 아니잖아. 말한 적 없지만 그건 명백한 호감의 표시였고, 교활한 방식이었지만 그건 여전히 거절이었다. 눈을 피하지도 않던 그 얄미운 미소를 생각하면 마음이 뭉쳤다.
“웬일이야? 우리 회사까지.”
“.......”
저 얼굴이었다. 늘 종인을 못 견디게 하는 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하게 웃으며 반가운 체 하는 얼굴. 그래 맞아. 엄밀히 말하면 그의 얼굴이 말하는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난 적 없다.
“내가 부사장인 건 알고 있는 거지?”
“알아요. 입구에서 누구시냐고 되게 꼬치꼬치 묻던데. 귀찮았어요.”
“문자온 거 못 봤으면 못 들여보낼 뻔했어.”
앉아. 하고 말한 백현은 제 책상 쪽으로 걸어가며 턱짓으로 물었다. 인터폰을 누르곤, 차 마실래? 커피? 하고 묻는다. 커피요. 차갑게 주세요. 곧 비서의 목소리가 인터폰 너머로 낭랑하게 들려왔다. 응, 손님은 아이스커피. 난 차로 해줘요. 커다란 책상을 돌아온 백현이 맞은편에 앉는다. 조간 임원회의에서 막 돌아왔다는 그는 재킷까지 갖춰 입은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갑갑한 듯 재킷을 벗어 옆자리에 겹쳐두는 것을 천천히 눈으로 좇았다.
“참고로, 오 이사 있는 회사는 맞은 편 건물이야."
“......."
“알면 됐고."
테이블 위로 얌전히 놓인 찻잔을 집어 들며 백현이 힐끗 제 안색을 살폈다. 습관인 듯한 유려한 미소에 시선이 끌렸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그게 반대로 화살이 되어 악다구니를 쓰고 싶게 만든다. 정말,
“들렀다 가지? 좋아할 텐데. 오세훈이 은근히 이벤트에 약하..."
형편없구나, 당신.
“들르면요. 여기에 먼저 왔었다는 말도, 해도 돼요?"
“......."
“나랑 장난해요?"
종인도 마음만 먹으면 내키는 대로 굴 수 있는 면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별로 그러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이제껏 전혀 그런 적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 오히려 변백현이나 오세훈 같은 겉만 번드르르한 바보들보다도 자신은.
“존나... 후지다 진짜.”
“.......”
“오세훈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얼굴 보고 싶은데 볼 일이 없어서 여기까지 온 거 알면서. 왜 그래요.”
울컥하는 심정에 짜증스레 쏘아붙이자 그는 입술을 열었다 달싹이며 다시 다물었다. 이때껏 제 속을 뒤집던 화려한 언변을 보이지도 않는다. 이렇게 막상 있는 그대로 들추고 들면 점잖은 체 하느라 말도 못하고 제 눈치나 살필 거면서. 밉다.
종인은 한 번도 원하는 걸 갖지 못하게 되어본 적 없다. 언제 무엇이든 수월하게 가질 수 있었고, 제가 가질 수 없을 양이면 제게 마음을 쓰는 누군가가 가질 수 있도록 해줬다. 춤을 추는 사람의 결핍이라고 쉽게 말했지만, 실은 그 결핍이 통렬했던 적 없으니까.
백현이 말을 아끼는 쪽을 택했다고 해서 그게 제게 숙여주겠다거나 제 뜻대로 휘둘려주겠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다. 알고 있었다. 어려운 남자란 것쯤. 그래서 더 속이 상하고 자존심도 아팠다. 언제는 마치 작업을 거는 남자처럼, 열에 채인 제 속내를 애써 감추려는 것처럼 점잔빼는 얼굴을 입은 변백현이었는데. 어느 새 돌아보면, 이렇게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오세훈의 사촌형인 체를 한다. 그게 막연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괴로웠다.
9
세훈은 꼭 그의 풍족한 경제적 여건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충분히 향유할 만큼의 다듬어진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적당히 사치스럽고, 적당히 트렌디했다. 세훈과 만나면서 종인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여가 같은 것이 다양해진 건 단지 그가 평균보다 월등하게 부자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특히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백화점이나 명품 갤러리는 흔한 데이트 장소 중 하나다. 어차피 매번 밥먹고 섹스만 할 순 없었고, 그렇다고 항상 해외로만 나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옷에 관심이 많아 늘 굉장히 세련되게 갖춰 입는 세훈에 비해 종인은 큰 관심은 없었다. 기존에 갖고 있던 몇 벌의 질 좋은 옷이나 선물 받은 것을 잘 조합해 입는 정도였는데, 스타일이 좋은 탓에 적당히 입어도 태가 났다. 세훈은 '내가 너였으면 옷을 천 벌은 샀을텐데.'하고 아쉽다는 듯 말했지만 '니가 입는 게 더 멋있어.'라고 말해주었을 땐 아이처럼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직설적인 칭찬에는 어색해하면서도 기분 좋은 걸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 평소의 자로 잰 듯한 미남과 퍽 다르다. 그렇게 말했어도 워낙 본인이 관심이 많은 탓에 자주 같이 나오게 되었고, 본인 옷을 고르러 나왔다가도 종인에게 몇 번씩이나 갈아입혀 가며 만족해했다. 입고 나오는 족족 맞춤옷처럼 늘씬하게 어울리는 걸 보고 비죽이 올라가는 입꼬리에 귀찮다는 말도 못하고 몇 번이나 옷을 바꿔입다보면 어느 새 제 손에도 잔뜩 들려있었다. 하지만 하필 이런 곳에서 새로 산 럭셔리 브랜드의 쇼핑백을 든 여자와 함께 서있는 변백현과 마주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어어, 형? 은수누나!”
반가워하는 세훈의 목소리가 먼저 튀었다. 저와 먼저 마주쳤던 시선을 거둔 백현이 손을 들어보였고, 그의 옆에 선 여자가 웃으며 '세훈아.'라고 부른다. 세훈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인 여자의 존재를, 어째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건지 스스로의 나이브함에 놀랄 지경이었다.
“이 쪽은 유은수. 완전 어릴 때부터 알던 누나야.”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냐며 백현과 농담을 주고받던 세훈이 같이 커피라도 한 잔 할까? 말을 꺼내며 제 눈치를 흘끔 살폈다. 종인은 어중간한 심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누나도 오랜만이고, 나도 종인이랑 같이 왔는데. 라고 약간 들뜬 것처럼 말하는 세훈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백현이 음료를 가지러 일어난 동안 세훈이 여자를 소개했다. 집안끼리 친해가지고. 그의 소개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목례하며 웃는 얼굴은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은은하게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이나 카디건에 감싸인 가녀린 어깨가 예뻤다. 아마도, 백현의 말을 잘 듣는 여인.
“뜨거워. 좀 우러날 때까지 둬."
여자가 주문한 티가 담긴 컵의 리드를 무심히 벗겨주며 말한다. 자연스러운 챙김을 받는 게 익숙한 듯 은수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 요란한 광경도 아니었다. 물 흐르듯이 매끄러웠다. 그 모습을 보던 세훈이 소리 내 웃었다. 맞아. 누나가 얌전하게 생긴 것 치고 덤벙대지 좀. 민망한 듯이 웃는 여자의 얼굴은 사랑스럽다. 백현은 옆에서 제 몫의 커피가 담긴 잔이나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시선이 진득하게 엉겼다. 백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미 식사를 해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밥이 얹혔을지 모른다. 그렇게나 요리조리 잘 도망 다니면서, 왜 이럴 땐 피하지 않아요. 세훈과 그녀가 안부를 나누는 것 외에는 조용한 카페의 테이블 위로 끈질긴 시선이 이어졌다.
두 사람과는 그렇게 커피를 한 잔 하고 헤어졌다. 카페를 나와 갤러리의 이쪽과 저쪽으로 방향을 달리하는 길목에서 갈라섰다. 이 다음 모임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비어서 잠깐 들른 거였다는 백현의 말에 은수가 세훈을 보고 말했다. 세훈이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정수오빠랑 지현이도 온대. 혜주도. 다들 궁금해 할 텐데. 본지 오래 됐지? 하고는 눈을 예쁘게 접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종인씨랑 보내는 게 훨씬 재밌겠지? 그녀보다 조금 뒤에 서있던 백현이 눈살을 조금 찌푸려 웃으며 나무랐다. 쓸데없는 소리해서 부담주지 마. 나무라는 투에 은수가 어깨를 움츠리며 작게 웃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 어깨를 살짝 제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세훈에게는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내일 반납해라. 오오, 변백현 찬스. 세훈이 어린 소년처럼 표정을 쓰며 좋아했다. 세훈에게 분명 천진한 구석이 있지만 사실 연인의 입장에서 마냥 애 같은 남자는 아니었는데도, 지금은 꼭 어리광을 받아주는 손위의 형제를 둔 보통의 어린 남자 같이 느껴졌다. 더구나 본인이 경제적으로 제약을 받는 처지도 전혀 아니면서, 마치 드문 기회가 주어진 것 마냥 꼭 비싼 거 먹을게- 하고 농담을 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이상한 미시감이 들었다. 그들 간의 자연스러운 보통의 형제 같은, 아니 보통보다는 조금 각별한 관계가 마치 큰 부자연스러움처럼 끼쳐들었다.
그에게 만나는 여자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자신의 감정에만 매몰돼 있었기 때문에 거기까진 종인이 생각해보지 못한 변수였다. 손을 잡고 있진 않았지만 느껴지는 자상함과 편안한 거리는 연인의 것이었다.
“그 분은, 여자친구야?”
맞은편에서 잘 익은 스테이크를 작게 써는데 막 집중하던 세훈이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세훈은 이 식사를 위해 백현이 건넨 카드를 함부로 쓰진 않을 것이다. 그걸 엄청 신난다는 듯이 덥석 받아든 건 아마도 그들의 관계성이겠지. 어쩌면 생각보다 편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긁어버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 또한 역시 정말로 세훈이 제 카드로 할 여유가 없어서도 아닐 테니까. 그저 그는 세훈이 당연하게 믿는 남자이니까. 참 좋은 관계다, 라고 생각했다.
“너 용케 거기서 안 물어봤네. 사실 나도 아까 소개할 때 좀 고민했는데... 글쎄, 여자친군가. 여자친구지? 좀 애매하네.”
“그게 뭐야.”
“뭐 은수누나는 애인이라고 생각할 테고 변백현은 아닐 테니까.”
“.......”
“정확히는 누나도 결혼할 거라고 믿고 있는 거지.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다들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직까지도 백현이형이 딱 여자친구라고 얘기한 적은 없긴 한데, 그래도 그런 거 있잖아.”
“.......”
커틀러리를 내려놓은 세훈이 등을 뒤로 젖혀 앉았다. 괜한 말을 걸어 입이 짧은 세훈의 식사를 멈추게 한 건가 싶었지만 세훈은 이미 곰곰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 만났어도 결국엔 돌아왔었으니까.”
은수누나가 그 자리에 계속 있었던 걸 수도 있고. 라고 덧붙인다. 점점 종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뭘까, 단지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말한 것보다 더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마 그녀에게도 과히 행복한 관계의 정의는 아니겠지만. 입맛이 뚝 떨어진 종인이 마저 커틀러리를 한쪽으로 몰아두었다. 그럼 그 때, 백현이 가장 사랑했다던 연인은.
“그냥 암묵적으로. 형도 어차피 결혼한다면 은수누나랑 하게 될 거란 거 알고 있을 걸. 약간, 공식 며느리 같은 거? 옛날부터. 외할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걸? 가족행사 때도 몇 번 부르셨어.”
“그러니까, 대체 그게 뭐냐구....”
길게 꼬았던 다리를 풀고 테이블에 바짝 붙어앉은 세훈이 우스꽝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며 웃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난 모양이었다.
“나쁜 남자지 변백현? 사실 좀 그래.”
그렇게 말했지만, 웃는 세훈의 얼굴은 진심으로 백현이 나쁘다는 뜻을 담고 있진 않다. 백현이형이 매너가 좋잖아. 나한테 직접 보여준 적은 두세 번 밖에 없는데, 주변에 여자도 많을 걸. 은수누나가 괜히 고생이지. 왜 변백현을 좋아해서.
“어쨌든 누나 전시나 그런 거는 꼬박꼬박 가니까 형이. 아마 이번 졸업식도 꽃 들고 갈 거고.”
그 정도면 오히려 매너가 나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10
황당했다. 아침 일찍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현선그룹 홍보실 문화예술재단팀의 김유건 팀장입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통화 괜찮으십니까?
잠이 다 깨기도 전에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받은 전화의 결론은 재단에서 선정한 올해의 예술인에 제가 들어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제가 뜬금없이 현선이 뽑은 3인에 선정되었다라고? 잠이 확 깼다. 이렇게 아무런 언질이나 절차도 없이? 더구나 현선그룹은 제게는 어느 시점부터 더 이상 중립적인 집단이 아니다. 재벌그룹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문화인을 후원하거나 하는 건 드문 일도 아니지만 하필 현선그룹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세훈의 회사였고, 동시에 백현의 것이다.
당장 따져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안내받은 장소로 찾아오긴 했지만, 막상 오늘이 당장 그룹에서 반기마다 내는 문화 매거진에 싣기 위한 인터뷰와 사진촬영을 진행하는 날이란 걸 알았을 땐 정말 한계였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너무나 급작스런 통보에 급작스런 진행,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 황당함에 합당한 설명을 해주기엔, 세훈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고 제게 따로 귀띔해준 적도 없었다. 세훈의 성격에 이게 만약 서프라이즈라면 어떻게든 티를 내고 싶어 힌트라도 줬을 터였고 애당초 그렇게 속내가 겹겹이 가려진 남자도 아니었다.
‘현선그룹 사람들.’ 대충 콘셉트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관계자가 건네준 지난 호 매거진을 성의 없이 뒤적였다. 여전히 황당함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이건 지나친 겸손의 문제가 아니다. 하루아침에 불려와 일사천리로 참여하는 인터뷰 치고는 메이크업도 사진 촬영의상도 지나치게 프로 수준이고, 관계자도 지나치게 많다. 무대 화장만큼 화려하고 진하진 않지만 만만치 않게 공들인 메이크업을 하고 앉아 있으려니 현실감이 없었다. 지금은 톡톡한 크림색의 터틀넥 니트를 입었지만 조금 있다가는 발레 콘셉트를 살리기 위한 조금 더 타이트하고 화려한 쿠튀르로 갈아입을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통 집중이 되질 않아 아무렇게나 책장을 펄럭였고, 밑에 켜켜이 쌓여있던 고급 용지로 된 매거진이 밀려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어...,”
“보기보다 조심성이 없네 이쪽도.”
시야로 불쑥 들어온 손이 먼저 책들이 처참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막아냈다. 익숙한 아름다운 손. 고개를 들자, 예상했던 대로다. 멀끔한 얼굴을 한 백현이 거기 서있었다. 한 대 쳐주고 싶네 정말. 종인은 입술을 부루퉁하게 비죽였다.
“한 눈이나 팔고. 자꾸 손 가게 하고 말야.”
“뭐예요.”
“인터뷰 준비는 잘 되나. 처음 해보는 건 아니잖아?”
“아니, 이게 다 뭐냐구요.”
단정하게 채워져 있던 더블재킷의 버튼을 풀어낸 백현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탁자 위에 놓인 매거진 한 권을 집어 펼치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한다.
“그렇게 됐네.”
“뭐가 어째요.”
“내부적인 거야. 어차피 이게 국가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 그룹에서 문화예술 후원 차원에서 뽑는 거니까.”
발끈한 종인이 집요하게 노려보자 그제야 백현이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왔다. 의심이 가득한 반항적인 눈초리에 서글서글하게 씩 웃어보인다.
“올해 문화 쪽은 너, 소프라노 서진아 씨, 그리고 김경필 화백. 이렇게 선정됐어.”
“.......”
“전혀 내 입김은 아냐. 마음 놓고 자랑스러워해도 돼.”
“.......”
“뭐냐면,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란 뜻이라구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종인씨.”
기어코 미심쩍다는 표정을 종인이 지우지 않았던지 바람새는 웃음을 지은 백현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해보였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에, 온갖 국제무대에서 러브콜을 받는 전도유망한 발레리노인데. 수상할 게 뭐가 있어?”
“말은 잘 하죠.”
“진짜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니까.”
“왜 왔어요? 오늘은 회장님도 안 보이시는 것 같은데.”
체념한 종인이 화제를 대강 전환했다. 더 따져봤자 원하는 답을 얻을 것 같지도 않았고, 백현의 말마따나 제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낮은 자존감도 아니었다. 원래 현선그룹은 일을 이렇게 정신없게 하나 보죠. 번갯불에 콩 볶아 먹기. 번갯불에 후딱 볶은 콩 치고는 제법 공들인 세트 같긴 하다만. 종인은 책을 아예 덮고 주위 세트장을 휘 둘러보았다. 분주히 뛰어다니는 스태프의 규모도 적당하고, 장비나 세트 등이 그럴싸하다. 오늘 사진 촬영을 맡아주기로 했다는 포토그래퍼가 눌러쓴 베레모에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도 적당히, 전형적이다. 공식행사인가. 제가 첫 순서이고, 다른 두 선정자는 조금 뒤에 차례로 도착할 거라고 들었고, 이쯤 되니 나름대로 식이 있는 행사인가 싶기도 했다. 늘 그렇듯 근사한 정식의 슈트를 빼입은 백현을 넘겨다보며 투정 반, 불만 반으로 따지듯 묻는다. 왜 왔어요? 또 개회식이라도 해요? 백현이 대답했다. 그의 손목에 걸쳐진 백금시계가 빛에 반사되어 화려하게 빛난다. 그냥,
“너 잘하나 볼까 하고.”
“.......”
이제 와서 확신이라는 말은 우습지만, 그가 보통의 모든 남자에게 이렇게 대하진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11
“술 한 잔 못 사줘요? 일부러 뽑아준 건 아니더라도. 술 한 잔 사줄 순 있잖아요. 돈도 많으면서.”
데려다줄게. 주차장으로 나오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렇게 말하던 백현에게 술을 사달라고 하자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였다. 아님 됐어요. 나두 차 갖고 왔는데. 같이 갈 것도 아닌데 그럼 뭣하러 데려다줘요? 내 차는 어떡하라고. 투정하는 투를 쓰자 순순히 제 차가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비싼 술 먹을래요. 위스키.”
잘 아는 바로 데려가줘요. 종인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가 키핑 해놓은 리스트 중 가장 비싸고 오래된 것을 골랐다. 잔뜩 약 올리듯 신이 난 애 같은 표정에 백현이 피식 웃는다.
“발레가 주제인 영화를 봤어. 저번 주말에 시간이 좀 나길래.”
종인의 의문 어린 시선에는 조금 멋쩍어 하는 기색을 보였다. 발레는 잘 몰라, 하지만, 이라고 말하며 제 마음에 해일이 되던 남자.
“관객이 너무 예의가 없었잖아. 기본은 알고 볼까 해서.”
그렇게 말하는 입술에 종인의 도톰한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멋있더라, 여자나 남자나 다.”
“........”
“근데 니가 더,”
입술이 바싹 말랐다. 말의 텀이 생각보다 더 길었다. 얇은 입술을 달싹거리던 백현이 쥐고 있던 잔을 입에 단번에 꺾어 넣었다. 손바닥 안에 빈 잔을 굴린다.
“잘하더라고.”
“.......”
다른 말이잖아. 나는 알아요.
진탕 취했다. 바닥이 눈앞으로 올라오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백현이 어느 정도로 취했는지는 잘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이 이리저리 휘청거렸어도, 제 눈앞에 그가 서있다는 사실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양쪽 다 썩 사정이 좋지는 않아보였는지 도와주겠다는 대리기사마저 성가신 듯 팁까지 줘 먼저 보낸 고집스런 남자가 피로한 얼굴로 저를 부축한 팔을 추스른다. 김종인, 비밀번호 뭐야.
“그냥 데려다주지 마요.”
“.......”
“그냥 가지 마요.”
“.......”
“같이 있자.”
“비밀번호.”
비밀번호 뭐냐고.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0114. 취하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그의 희고 긴 손가락 끝도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는데.
“나 그렇게 매력 없어요?”
“무슨 소리야.”
“아님 찔러보고는 싶은데, 나 갖긴 싫고 남주긴 아까운 정돈가.”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침대 위에 던지듯 눕혀진 주제에 입이 계속 제멋대로 말을 했다.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친 백현이 양 커프스를 아무렇게나 접어 올렸다. 날씨에 맞지 않는 더위였다.
“나... 예쁜데.”
“.......”
“열어보면 달라요. 그렇게 형편없지 않은데. 생각보다 더 괜찮은데.”
목을 조이던 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했다. 다른 건 됐고, 시원한 물이나 한 잔 마셨으면 싶었다. 잠이나 자. 이 쪽도 만만치 않게 마신 건 마찬가지였다. 컨디션이 별로였다. 데려올 땐 그대로 눕히기만 하면 정신을 놓을 상태인 것 같았는데, 어쩐지 맹랑한 말을 멈추지 않는다.
“도망가지 말고 더 알아보면 다르다고요.”
“.......”
두통이 일었다. 내일은 숙취가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사위가 어두워 사이드테이블의 스탠드를 조심스레 눌러 켰다. 터치식이다. 지나치게 밝아 두어 번 더 두드렸더니 조도가 낮아졌다. 그리고 그대로 손목이 잡아 채였다. 술에 잔뜩 취한 녀석이라 악력이 무식했다. 놀랄 새도 없이 몸이 크게 기울었다. 긁어내리듯 대책 없이 잡아채는 통에 커프스에 달린 단추가 우악스럽게 떨어졌다. 도르르. 마룻바닥을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간신히 균형을 잡아 종인의 고개 옆에 손을 짚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주정뱅이보다야 나은 형편이지만 이 쪽도 이렇게 무식하게 잡아당겨지기엔 썩 상태가 좋지 않다. 팔 안에 가둔 채 내려다본 종인의 눈이 짙었다.
“나 혼자 이러는 거..., 아니잖아요.”
“.......”
언제나처럼 그 시선이 종인의 눈과 입술을 집요하게 훑는다. 하지만 키스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너무 억울했다. 착각 아니잖아, 개자식아. 늘 그런 눈으로 벗길듯이 보면서. 잠이 쏟아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12
종인은 드디어 이사를 허락했다. 그간 이런 저런 핑계로 버티며 저를 애태웠지만, 어차피 쓰지 않는 집이나 마찬가지인지 오래였으니 당연한 수순 같은 거였다. 이번에도 별 기대를 않고 그 집, 처분하지? 하고 지나가듯 물었는데 의외로 쉽게 허락했다. 뜻밖의 수월한 반응에 기분이 좋아져 얼굴을 부여잡고 키스하자 간지러워어, 하며 늘이는 말끝이 사랑스러웠다. 다음 달 새로 공연을 시작하는 종인이 합동연습에 가 있는 동안 세훈이 대강 자잘한 짐만 챙겨오기로 했다. 종인은 경계심이 강한 듯 하면서 또 한편으로 물렀다. 연애를 하면서 얼마 되지 않아 쉽게도 현관문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또 이사는 안한다고 하고.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제가 이렇게나 빠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긴 휴식이 끝났다며 투덜대던 잠에 퉁퉁 부은 얼굴. 비식 웃음이 났다. 이것저것 들춰보며 하나씩 주워 담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사실 딱히 영양가 있는 일을 하러 온 건 아니었다. 어차피 물건욕심이 크게 없는 종인의 집엔 살림이 많지 않고, 대부분의 것은 이삿짐센터에 맡기면 알아서 할 것이다. 세훈이 집어드는 건 대체로 종인의 액자라던지 옛날 영상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개인 소지품 같은 사소한 거였다.
“......?”
슬리퍼를 신은 발끝에 뭔가가 채였다. 슬리퍼 탓에 감촉은 느끼지 못했지만 어딘가에 부딪쳐 튕기며 탁, 하는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휘 둘러보자 이내 발치로 다시 굴러온다. 단추. 허리를 굽혀 주워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물건이었다. 손가락 사이에 두고 한번 둘러 천천히 살폈다. 종인은, 셔츠를 입지 않는다. 셔츠를 입으면 기가 막히게 어울릴 드레시한 몸매를 가지고도 불편하다며 싫어해서 늘 아쉬워했던 쪽은 세훈이었다. 그 셔츠, 꼭 사주고 싶은데. 하고 말해도 그럼 다른 거 사줘, 하며 마음에도 없는 물건을 집곤 했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입지 않아서, 셔츠가 가득한 제 옷장과는 퍽 구성이 달랐다. 단추가 있는 옷은 거의 없는데. 기시감에 등줄기가 잠시 서늘해졌지만 이내 지워냈다. 물론 드레스룸을 열어 종인의 몇 벌 안 되는 셔츠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찜찜한 건 단지 기분 탓이다. 분명 종인의 옷장을 열면 단추가 떨어져나간 셔츠가 아무렇게나 걸려있을 테니까. 출처가 불분명한 의심을 하고 싶지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뭐가 됐든, 아직은.
문득 먼지가 앉은 거실 탁자 위 덩그러니 놓인 화병이 눈에 들어왔다. 색이 바랜 프리지어. 종인이 그렇게 정성스레 다듬고 물을 채워 담았던 꽃은 어느 새 시들어 노란 꽃잎이 바짝 말라있다. 그 때 답지 않게 의미를 두는 것 같긴 했지만 본래 종인이 이런 걸 지속적으로 관리할 만한 주변머리도 아니다. 이런저런 일정과 공연 준비로 정신없이 보내고, 자신의 집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연히 잊혀졌을 법 했다. 차가운 물에 손이 젖어 제 노동으로 꽃을 만지는 종인이 못 견디게 예뻐서 그 날 몇 번이고 안았다. 매번은 아닌 한계까지 몰아붙여 울먹이게 하면 파르르 떨며 안겨오는 손끝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세훈은 말라비틀어진 꽃뭉치를 집어 든 것 하나 없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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