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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미 소프틀리 4

매리엇 2018. 2. 17. 20:41

13

 

딱히 이사라고 칭할 것도 없는 둘만의 간단한 이사였다. 세훈의 집으로 짐을 옮겼고, 기존에 있던 집을 완전히 정리했다. 어차피 주생활권이 세훈의 동네가 된지 조금 되었었다. 대부분의 큼지막한 짐은 정리가 되었고 한 침대를 쓰니 구조적으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매트리스는 버렸다. 가지고 들어온 것 중에 가구라고 할 만 한 건 종인의 개인 책상이 다였다. 어쨌든 대충 정리는 했으니 축하해야지. 종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훈이 냉장고에서 치즈와 청포도를 꺼낸다. 어제 함께 장봐온 와인 안주였다. 아직 낮이지만, . 휴일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와인 마개를 따려던 세훈이 잠깐 멈추었다. 식탁 위에 턱을 괴고 그의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종인이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이쪽을 쳐다본 세훈의 얼굴이 다소 무표정했다. 이사를 조르며 그토록 고대하던 건 세훈이었는데, 어쩐지 최근 들어 저조해보였다. 평소에도 말이 많다거나 들떠있는 타입은 아닌 걸 감안하고서도 미묘하게 가라앉은 느낌이다. 단순히 예상했던 것보다는 기뻐하는 티를 덜 내는 것뿐일까.

 

변백현 이 근처래.”

 

그리고 내뱉은 말은 전혀 예상 밖의 맥락이다. 괜히 맥이 탁 풀렸다. 묘한 긴장감이 사라진 동시에 던져진 화두에 대한 새로운 긴장이 따라왔다.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것도 세훈의 입에서. 이런 순간마다 늘 필요 이상으로 경직됐다. 그 날 밤 백현은 그대로 저를 남겨두고 돌아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론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접점도 없었고, 두려웠다. 어차피 종인에게 남은 건 매정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뿐이다. 그는 키스하지 않을 테고, 자신은 그를 좋아해선 안 되고, 그 역시 저를 좋아하지 않겠지.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 사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뀌었던 적 없다.

 

... 그래?”

오라고 해?”

 

세훈의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의중인가 싶어 종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단순히 제 의사를 묻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쩐지. 곧 켕기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엮여서 좋을 것 없다는 사실이라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게 정말 질문이라면, 대답은 만나고 싶기도,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답은 하나인데 마음은 두 가지였다. 이런 걸 미련이라고 부르는 걸까. 애매한 기분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그거야 뭐... 니 맘대로 하는 거지.”

둘만 있고 싶다고 말해. 나 진짜 돌겠으니까.”

 

종인은 어중간하게 굴리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번뜩 돌려 세훈을 똑바로 보자 그는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종인으로선 처음 보는 얼굴이다. 황당했다. 갑자기 저렇게 치기어린 으르렁대는 얼굴을 하는 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종인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순간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말을 곱씹었다. 그 욱하는 말투까지도. 둘만 있고 싶다고 말해? 시작부터 그랬듯 아직까지 이 관계는 세훈의 열렬함을 종인이 따라가는 편이어서, 가끔 애석해하는 척 어리광을 부리곤 했지만 갈증을 내는 법은 없었다. 내가 더 좋아하는 건 아무 상관없어. 어차피 계속 그럴 테니까. 그냥, 넌 받으면 돼. 계속. 계속이라고 두 번 말한 데서 그의 마음이 드러났다. 표현은 적었어도 늘 솔직하게 드러났다. 정말 별 생각 없다는 듯 무미한 투로 툭 내뱉어 놓고, 그러나 저는 알 수 있을 그 정도였다. 그 이상은 없었다. 백현은 어디까지나 그의 사촌이고, 적어도 아직은 그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단지 마음대로 하란 말에 화가 났던 걸까. 무책임해 보여서? 아무것도 여전히 관심 갖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애정의 보폭을 맞춰주는 게 좋다는 건, 종인도 그걸 알 만큼은 경험이 있었다. 황당했지만 똑같이 뾰족하게 굴고 싶진 않았고, 종인은 짐짓 순하게 제 의문을 드러냈다.

 

그게 웬... 무슨 말이 그래?”

“...됐어. 그냥, 오라고 한다. 어차피 코앞이래.”

 

어느 새 감정을 갈무리한 얼굴이었다. 더 묻고 싶기도, 따져 묻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세훈이 셔터를 내렸다는 것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뺨이 약간 우릿하게 일어난 채 불퉁한 얼굴로 찬장을 열어 와인 잔 세 개를 꺼내는 세훈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은수누나는?”

자주 못 봐. 걔 요즘 석사 졸업전시 때문에 정신없어.”

전시가 언젠데.”

글쎄, 다음 달 말인가.”

정확히 말해줘야 가지.”

다시 정확히 물어볼게.”

 

아이러니 했다. 그 전에 작은 트러블이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막상 백현이 문 앞에 서있던 이후로는 매끄러웠다. 차가운 물방울이 맺힌 청포도 알을 톡 뜯어내며 얘기하는 세훈의 투며 백현의 대꾸가 평소 같다. 우스웠다. 문이 열린 순간 그 틈으로 멋쩍은 눈인사를 나눴지만 저와 백현 또한 공유되지 않는 서사로 여기에서 겸연쩍게 굴 수는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선선한 인사, 안부.

이거. 찾았어, 큰 캐리어에서. 일부러 빼놓은 거야?”

 

방에서 세훈이 들고 나온 건 비디오테이프였다. 한 눈에 봐도 종인은 그게 뭔지를 알 수 있었다. 비디오 플레이어 자체가 거의 다 없어진 지금에야 별 의미가 없지만, 한 때는 소중하게 간직했던 테이프다. 제 데뷔 무대가 담긴. 이삿짐을 챙길 때 분류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없애기로 결정하지도 못한 것들을 밀어 넣었던 것 같다. 딱히 살림을 산 것도 아닌데 생각 이상으로 잡다한 짐이 많다고 생각하며 아무렇게나 상자에 담았다. 그 중에 저런 게 섞여 있을 줄이야.

 

테이프를 들고 온 세훈이 허리를 숙여 거실 TV 밑에 있던 멀티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집어넣었다. 고사양일 거라곤 생각했지만 별로 관심 없이 봐와서 요즘 같은 때 비디오 플레이어 기능까지 갖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아,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민망할 게 분명했다. 종인 자신도 본 지가 오래돼서 어떤 모습들이 담겼었는지도 뜨문뜨문 기억나는 수준인 만큼 이렇게 무방비하게 공개하기엔 창피했다. 저도 모르게 으- 하며 얼굴을 쥐자 옆에 있던 백현이 작게 웃었다. 지직- 노이즈가 일며 시작화면이 떴다. 요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화질이 떨어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무대는 전체를 중심으로 담았고, 가끔은 줌아웃이 되며 인물이 작아지기도 수 차례였지만 종인에겐 자신 중심으로 보였다. 그들에게도 그렇게 보일까. 세훈, 그리고 백현에게도. 같은 무대를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선 적이 있었다. 국립발레단에 정식으로 고용되고, 수석무용수가 된 이후에도. 워낙 클래식이라 이제는 인이 박힐 정도인 그 무대. 그 모든 게 낯설고 긴장되던 저 날의 감정이 그대로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세훈과 백현은 별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제 옆으로 소파에 앉은 백현은 꽤 집중한 얼굴로 화면만 주시하고 있었고, 러그 위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세훈의 뒤통수도 딱히 미동이 없다.

 

와인 더 갖고 올게. 뭐로 마실래? 본 공연이 끝나고 백 스테이지와 후기 영상 등으로 돌아갈 때쯤 세훈이 접었던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화면에는 객석이 가득 찼다가 이내 공연자들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 앞 다투어 소감을 쏟아내고 환호하는 모습. 제가 저 때 어디에 있었더라. 눈에 펄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화장을 한 채 즐거워 보이는 여자 무용수들이 여러 명 등장하도록 종인은 나오질 않았다. 화이트? 아니면 바꾸지 말고 그냥 레드 마셔? 세훈이 주방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종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종류를 갖고 올 모양이지만, 이왕 레드로 시작한 것은 바꾸지 않는 편이 좋았다. 백현이 손을 내저었다. 난 됐어.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백현은 술이 썩 센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날은 제 쪽이 진창 취할 걸 대비해 적당히 조절했을 뿐이다. 세훈은 술이 셌다. 아마도 처음 깐 와인 병의 반 정도는 세훈이 홀짝홀짝 마셔댄 것이다.

 

“.......”

“.......”

 

한동안 침묵이었다. 세훈이 빨리 돌아오길 기다릴 정도였다. 어느 새 화면에 클로즈업 된 그 당시의 종인이 잡혔다. 서투르고 뜨거웠던 몸짓, 그걸 끝까지 해낸 어리고 풋내 나는 얼굴이 상기된 것까지도 다 보였다. 붉어진 얼굴. 누군가 안겨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약간은 들떠있는 흥분된 말투. 좀 전까지 울었던지 눈 화장이 흐리게 번진 주제에 흐드러지게 웃는다.

 

예쁘네.”

 

정적을 깬 건 백현 쪽이다. 내용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무심한 투였다. 사실은 아까부터 묻고 싶었다.

 

은수가, 애인...이에요?”

 

이 사소한 물음 하나를 하려고 수번을 속으로 억누르며 별러왔던 게 무색하게도, 그는 너털웃음을 지어버린다.

 

애인은 아니고.”

“.......”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안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기가 막혔다. 차라리 애인이라고 말했으면 미친놈 취급이라도 했을 걸. 누구의 이벤트에든 품안 가득 꽃을 안고 근사한 웃음을 지어보일 남자란 걸, 나는 당신에게 야속함을 느껴선 안 되는 그런 사람인지.

 

울지 마, 감당 못해.”

 

나직하게 말한다. 여전히 시선은 화면에 둔 채로. 화면은 이제 다른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뭐야, 이 분위기.”

“.......”

싸웠어 둘이?”

무슨, 애냐.”

 

, 내가 딸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백현이 세훈 쪽으로 손을 뻗었다. 뭐 안 마신다며. 너 따라준다고. 세훈과 그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종인은 러그의 무늬를 셀 듯 줄곧 눈을 박았다.

  




  

14

 

세훈의 출장에 동행했다. LA2주 남짓한 출장이었다. 일정은 넉넉했다. 임원에 대한 보상적 성격이 강한 출장이었다. 세훈은 거기에 며칠의 휴가를 붙여 냈다. 미국으로 2주간 출장이라는 말에 종인이 기네, 하고 대답했고 물끄러미 눈을 맞추던 세훈이 허리를 껴안으며 물었다. 같이 갈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청하는 말에 종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성을 높인 적 없지만 근래 묘하게 핀트가 안 맞고 있고, 리프레시가 필요하다는 데 종인도 동의했다. 마음이 제멋대로 굴러가는 것과 또 다른 문제였다. 노선을 잡아야 했고, 이쪽도 열정이 다했다고 하기엔 아직은 서운한 관계였다. 설익은. 여전히 천천히 끓는점을 향해 오르는 중인. 아마도 백현이 없었다면, 이 관계가 진즉에 끓는점에 오르지 않았을까. 서서히 차곡차곡 꾸준하게, 사랑에 가닿지 않았을까. 종인은 생각했다. 세훈은 그럴 만큼의 충분한 매력도 능력도 있는 남자였다.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한 눈을 판 건 전적으로 제 잘못이다. 으응, 나도 갈게. 하는 어리광 섞인 대답에 기분이 들떠 곧바로 키스해오는 세훈이 귀여웠다. 악순환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평소보다 유순하게 굴게 되는 건. 애정이 없는 게 아니었다. 보면 좋았고, 함께 있으면 그 시간이 평화롭게 흘러갔다. 마주보는 시간. 사랑을 말하는 순수하고 직설적인 세훈. 하지만 자신을 그토록 미치게 하는 감정은.

 

LA에서의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다. 날씨가 환상적이었다. 세훈이 간단한 공식일정을 마친 이후로는 쭉 휴가였다. 강박적인 일정을 잡지 않고 내키는 대로 여유롭게 움직였다. 해변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고, 물에 잠깐 몸을 적시고 나와 커다란 파라솔이 드리운 베드에서 빈둥거렸다. 세훈의 평소 스타일은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휴가 내내 평소 이상으로 기분이 좋아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도 통 지루해하질 않았다. 호텔 룸에 달린 발코니의 아침 경치가 볼 만 해서, 발코니에 일 없이 나와 있다 장난치듯 입을 맞추고 떨어지고 했다. 해를 등지고 선 세훈이 웃으면 빛이 산란하는 듯 보였다. 거기서 만큼은 온전히 한국에서의 모든 일에서 동떨어져 나온 기분이 들어서, 막 한국에 귀국했을 때의 밀려오는 현실감이 퍽 낯설게 느껴졌다.

 

둘 다 제정신이야?”

 

백현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아무렇게나 책상위로 내던져놨다. 이음새를 맺는 금속철이 원목에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화를 내는 얼굴은 낯설었다. 노련한 처세나 화술로 능구렁이처럼 에두르려 했어도 언뜻 숨겨지지 않는 뾰족한 구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쨌건 기본적으로는 유들유들한 타입의 남자였다. 특유의 위트로 무마하려는 데에는 속이 다 뒤집힐 정도였는데. 지금 눈앞에 마주한 그는 상당히 냉랭하고 신경질적이다.

 

귀국하자마자 호출당해 짐을 풀기도 전에 끌려들어온 세훈의 얼굴도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손을 허리춤에 얹고 비딱하게 선 백현은 한소끔 성질을 참아내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하게 서있던 종인과 눈이 마주쳤다. 경솔했다면 둘 다 마찬가지였겠지만 그가 꾸짖을 대상은 세훈이었다. 생각이 짧았다. 종인도 입국장에 들어서서 휴대폰을 켜자마자 울리는 메시지와 전화를 확인하기도 전에 백현의 비서실로부터 호출 당하면서 그제야 깨달았다. 아차 싶었다. 자신들의 존재감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지했다. 누군가에게 포착될 수 있다는 사실도. 제법 알려지긴 했지만 연예인처럼 일거수일투족이 민감하게 다뤄지는 것도 아닌지라 보통 편하게 일상을 영위하다보니 그랬다. 저들이 완전히 일반 사람만큼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을 자꾸만 망각하고 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포되기 전에 인지상정상, 혹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먼저 현선그룹 쪽으로 컨택이 들어온 덕에 백현이 노발대발했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결정적인 건 그의 선에서 커트되었지만 뒤에선 어마어마한 보이지 않는 비용을 감수했을 것이다. 백현이 직접 나서서 손을 쓴 명분은 어디까지나 계열사의 상무이사이자 사랑하는 오세훈의 대외적 평판을 위해서일 것이지만.

 

둘 다 유명인사야.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얼굴이라고. 안 그래도 공연마다 쫓아다닌다고 각별한 인연이니 의외의 친분이니 가십이라고 떠들어대는 판인데, 동반 여행도 모자라서 조심성 없이 스킨십을 하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

막아준 건 고마운데, 이게 형이 이렇게까지 화낼 문제야?”

 

면목 없는 얼굴로 서서 잠자코 듣고 있던 세훈이 처음으로 꺼낸 대꾸는 종인으로서도 의외의 것이었다. 괜히 발끝을 쳐다보고 있던 종인도 고개를 홱 들었다. 세훈은 볼멘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백현 역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숨길 생각 없다.

 

내가 경솔했다, 오세훈. 너 하는 짓은 어지간히 그러려니 하던 게 버릇이 되다보니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책 없이 두고.”

 

짧은 헛웃음 끝에 나온 날선 말투에 세훈은 입을 꾹꾹 다물었다. 세훈도 결국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건 그가 가진 뾰족한 부분이었다. 공격적인 타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담아두고 꿍하게 구는 건 견디지 못해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여려서 지금처럼 싸하게 냉각된 분위기는 더더욱 못 견뎌한다. 그 상태로 잠시 대치했다. 그 사이에서 가장 곤란한 건 종인이었다. 괜한 눈치가 보였다.

 

아 됐고, 나 담배 좀 피고 온다.”

 

손을 홱 저은 세훈이 끊어내고 돌아섰다. 오냐오냐 했더니 이런 꼴을 본다는 제 사촌의 일갈에 대강 입을 다문 것뿐이지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귀찮다는 듯 손을 성의 없이 흔들어 보이고는 금세 잡을 틈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어색한 기분으로 세훈의 뒤꼭지만 쳐다보던 종인과 역시 기분이 덜 풀린 듯 한 백현이 남았다. 당연하게도 적막이 이어졌고, 종인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자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린 백현이 괜히 아무렇게나 던져진 서류철 같은 걸 제자리에 뒀다. 괜히 딴청을 부리는 소리를 들으며 종인도 손톱 거스러미를 뜯는 체 했다. 탁상시계가 똑닥대는 소리, 그가 책상 위를 정리하고 마른손이 잔 먼지에 쓸리는 소리, 바깥에서 멀게 들려오는 작고 사소한 소음들.

 

재밌었어?”

 

적막이 깨어졌다. 갑자기였다. 종인은 고개를 들고 그를 마주했다. 다시 저를 보고 있다. 통유리로 비추는 빛의 역광을 입은 얼굴.

 

뭐가요.”

여행.”

... 재밌었어요. , 보셨겠다시피.”

 

그 말을 꺼낼 때는 조금 민망했다. 어디까지의 수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레짐작만 했다. , 괜히 목을 한 번 가다듬자 아랑곳 않은 백현이 팔짱을 끼며 비딱하게 기대섰다.

 

그래? 난 일이 너무 많아서 하루종일 일만 했는데. 더구나 누가 일을 얹어주신 덕분에.”

“......?”

“LA가 요즘 햇볕이 별론가봐.”

 

그리고는 다시 한동안 정적이었다. 백현은 알 수 없는 말을 해놓고는 다음 말이 없었고, 종인도 대꾸할만한 적당한 답을 찾지 못했다. 짐짓 다른 일에 열중한 체 한다. 그는 다시 책상 앞에 서 한참을 산만하게 부스럭거리다 양손으로 제 책상을 짚고 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말을 고른다는 걸 알 수 있다. 조금 전 던져놓은 말은 비꼬는 투로 들리기도 했다. 종인은 계속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히, 화내는 얼굴보다도 낯설었다. 변백현은 늘 농담마저 철저히 계산되고 절제된 듯한 남자로 느껴졌다. 적정한 선을 지키는 데도 이골이 났을 법한. 맨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다. 지나치게 생략되어있고, 의중을 선뜻 파악할 수 없었다.

 

많이 안 탔네,”

“.......”

 

특히 이렇게, 차가운 것도 뜨거운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은.

 

호텔에만 있었나.”

 

얼떨떨했다.

 

뭐에요..., 그 말투.”

 

턱을 치켜든 그의 뺨 께가 약하게 붉어져있다. 종인은 저도 모르게 백치처럼 입을 벌리고 말았다. 온몸에 전류가 흐른다.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이 기분을.

 

 

 

 

 

15

 

방문을 열었을 때 백현이 보이질 않았다. 세훈은 자연스레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휘적휘적 걸었다. 좁은 통로를 지나 드레스룸 문을 불쑥 열자 셔츠를 입은 백현의 등이 보였다. 여깄네, 이 양반. 타이를 매던 백현이 고개를 젖혀 돌아보았다. .

 

뭐해. 출근 준비중?”

어어, 왔어. 웬일이야, 아침부터.”

외할아버지가 잠깐 들어오라고 하셔서. 아직 안 일어나셨대. 뵙고 아침 먹고 가려고. 출근 같이 하자. 나 데려다줘, 차 안 끌고 그냥 넘어왔어.”

그래.”

 

그 때 이후 사적으로는 처음 대면이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두어 번 본 게 다였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있는 자리라 어중간하게 피해올 수 있었다. 크게 문제가 될 지경도 아닌데 어쩐지 정면으로 부딪칠 작심이 들질 않았다. 저를 대하기 어려워하긴 백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법도 했다. 여지껏 한 번도 그와 언성 높여 다투거나 감정 상한 적이 없었다. 이건 백현과 세훈 둘 다에게 처음 겪는 상황이니,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암묵적인 룰조차도 없었다. 한 번도 서로 어떤 을 해야 하거나, 마음에 없는 불편을 감수해야했던 적이 없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내는 건 세훈으로서도 큰 노력이었다. 백현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는 듯 했지만 노련함일 뿐, 결코 평소와 같진 않았다. 행여 다른 사람은 눈치 못 챌지 몰라도 둘만은 안다.

 

왔어, 우리 오 이사.’

 

세훈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연스레 그 말이 뒤따라야 했지만 혀가 굳은 듯 입안에 꺼끌하게 맴돌았다. 백현은 스킨십에 박한 편이 아니었다. 세훈의 나이가 이십대 중반이 넘도록 손을 태웠다. 평소대로라면 별 생각 없이 뺨이라도 한 번 툭 쓰다듬었을 터였다. 실제로도 나이차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백현은 늘 세훈을 실제보다 아주 어린 동생 대하듯 너그럽게 다뤄왔다. 세훈 역시 거기에 지나치게 익숙했다. 마음이 좀 상했다고 서로 데면데면하게 굴었다지만 비단 지난 며칠이고 20년이 넘게 그런 방식에 길들여져 왔으니 당연하다.

 

어색했다. 정확히 말하면 어색하다는 것 자체가 낯설다. 세훈은 그와 형제처럼 자랐다. 사촌 이상이었다. 종인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백현을 사랑했다. 아니, 종류는 다르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종인은 제게 조바심을 내게 하는 상대이고, 백현은 제가 의지하는 존재란 게 다를 뿐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줄 거란 배짱을 부려도 좋을 것 같은 사람. 처음 현선패션의 상무이사 보직을 받아 일하기 시작하고서야 알았다. 백현이 재계에서 전형적인 기업가 체질이라는 평을 듣는다는 것을. 유연한 척 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냉정하고 교활해서 젊은 녀석 같지가 않다는 평판. 그 전에는 집안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아 몰랐다. 그제껏 세훈이 아는 백현은 자신을 대하는 백현이 다였다. 늘 저에게만은 물렀다. 어떤 꼬장을 부려도 모르는 척 넘어가주었고, 엇나가자면 붙잡고 달랬다. 나는 그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이구나. 라고 확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자유롭고 아름다운 남자였고, 세훈의 엄마가 가진 돈이나 배경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사랑이었고, 성애이기도 했다. 그 산물인 세훈. 그녀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어린 세훈은 자연스럽게 본가로 들어왔다. 제 아버지가 상주인 빈소에 황망한 얼굴로 찾아온 큰외삼촌이 털썩 무릎을 꿇고 앉던 것을 세훈은 기억했다. 그렇게 나갔으면 잘 살기라도 할 것이지.... 가장 아끼던 여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의 옆에서 그의 부인이 세훈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았다. 세훈은 제 아버지와 건조하기 짝이 없는 악수를 나눈 큰외삼촌 부부의 손을 양쪽에 하나씩 잡고 돌아왔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게 끝이란 걸 알았다. 그는 뼛속까지 춤을 추는 남자였고, 자기자신의 슬픔만도 가누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렇게 따라간 본가에서 백현을 만났다. 우와, 나 동생 갖고 싶었는데. 너 수현이 있잖아? 에이, 수현이 말고요. 수현이도 예쁜데, 나랑 같이 축구도 하고, 공부도 같이 할 동생이요. 그 때는 세훈보다 키가 컸던 백현은 제 부모에게, 엄마아빠가 안 낳아주셨잖아요- 바쁘다구. 전 남동생도 갖고 싶은데. 하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그 일가에서, 백현은 유일한 숨통이었다. 그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회장의 냉대와 다른 친지들의 엄혹한 시선은 어린 세훈에게 상처로 남았다. 그 집에서 제 말을 경청해주는 건 변백현 밖에 없었다. 숨이 막혔다. 결국엔 견디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들어갈 때쯤 통학권의 오피스텔에 나와 살았다. 나가지 말라고 붙잡은 것도 백현과 그의 부모, 기어이 나가겠다고 했을 때 집을 마련해준 것도 백현이었다. 늘 노인의 기껍지 않은 시선을 마주하는 게 두렵고 울렁거려 어린 마음에 도망치고만 싶었다. 명절에도 잘 가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오지 않아 노인이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권세와 재산 모두를 가진 조부 밑으로 예외 없이 머리를 모으는 일가의 체제 속에서 세훈은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겉돌았다. 그럼에도 백현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저를 불러들였다. 스무살. 성인이 되어 몇 년 만에 노인을 마주했을 때. ‘그거, 인물값 좀 하겠구나.’ 칭찬이 아니었다. 그는 경멸하고, 미워했다. 제 아버지를 닮은 선이 또렷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세훈은 아직도 노인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 깔려있던 그 경멸을 기억했다. 그래, 당신에게 나는 결국 변씨가 아닌 오씨라는 걸 안다.

 

현선패션, 세훈이 주시죠. 오 상무 일 잘합니다. 추진력도 좋고, 감각도 있어요. 회사를 어지간히 크게 키워놓으셨어야죠, 회장님이.’

 

계열사가 몇 갠데, 저 혼자 감당 못해요. 같이 하시죠. 그렇게 승부수를 던지던 백현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눈웃음을 흘렸다. 함께 돌아나오던 백현은 여직 긴장된 제 어깨를 짐짓 거칠게 쥐고 머리를 헝클어 놓으며 진심으로 웃었다. 뻣뻣하게 있지 말고. 좀 귀염도 떨고, ? 언제 클래 꼬맹아. 키는 이미 한 중학생 때 이후 제가 더 컸는데도,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 그가 크게 느껴졌다.

 

그래, 자네 일 제법 해놨데. 좀 두고 보자, 오 이사.’

 

그렇게 노인에게 처음으로 받은 인정. 늘 출신부터 미덥지 않다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작아지게 만들던 회장이었다. 눈시울이 왈칵 뜨거워져 울음이 나올 것도 같았지만 꿋꿋이 참고 울지 않았다. 그럼 오 이사 데리고 나갈게요, 형제끼리 할 얘기도 좀 있고해서. 황은이 망극합니다, 할바마마. 능청을 떨던 백현이 대신 웃었다.

 

사실 입사 초반에는 막상 자리를 받아놓고서도 마음을 잡기가 어려웠다. 회사내의 텃세도 만만치 않았고, 다른 형제들의 견제와 초대형 낙하산이라며 뒤에서 수근대는 직원들의 비우호적인 태도에 오롯이 노출되었다.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세훈은 악의에 취약했고, 본질적인 외로움을 탔다. 어차피 직급으로 보나 출신으로 보나 출근이 불규칙하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자리도 아니었다. 제 얼굴에 그렇게 깽판을 내도 백현은 나무라지 않았다. 얼굴 보기가 미안하고 민망해 고개를 푹 숙인 세훈의 귓불과 뺨을 가볍게 터치했다. 니 반은 변씨니까. 너 은근 에프엠인 구석 있어. 영감님 손자 맞아. 그 때는 울었다. 어차피 백현 앞에서였고, 눈물을 참을 이유도 없었다. 정기적으로 출퇴근을 하게 된 건 그 때부터였다. 이번에 노인이 저를 불러들인 건 아마도 전무이사 승진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결국엔 비슷비슷한 자식들의 각축전인 콩나물시루 속에서 제 앞으로 운을 띄워놓은 것도 그일 테고, 그 우산 속에서 제 몫을 성실히 해왔다. 그 인내와 애정에 보답하고 싶어서. 잘했다는 칭찬을 받고 싶어서. 다 키웠네, 오세훈. 기특해 죽겠다는 듯이 웃는 얼굴도 보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했다. 이제 '진짜' 임원이 코앞에 와있었다.

 

백현이 타이를 마저 조이고, 향수를 가볍게 얹고, 드레스셔츠의 칼라를 매만지는 동안 세훈은 거울이 많은 드레스룸을 휘 돌아봤다. 잘 다려진 드레스셔츠의 진열이 마치 매장의 그것처럼 가지런하다. 무심코 둘러보다 멈칫했다. 따로 밖으로 꺼내져 구석에 놓여있는 셔츠. 자연히 시선이 거기에 머물렀다. 없다.

 

“.......”

 

비어 있는 커프스. 있어야할 곳에, 단추가 없었다.

 

세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손목시계를 꺼내드는 백현의 셔츠 소매를 약하게 잡아당겼다. 금세 돌아본다. ? 다정한 눈. 이 거리와 관심이 이렇게 익숙한데.

 

말해줘 형. 그 때 왜 그렇게 화를 냈어? 단지 나를 위해서? 형이 그렇게 아끼고 공들여 만든 내가, 조심성 없이 구는 게 화가 나서? 제발 그렇다고 말해. 왜 그런 얼굴을 했어.

 

.”

.”

나 진짜 형 좋아해.”

.......

알지. 나한테 중요한 사람 몇 안 되는 거.”

.......

“...나 힘들게 만들지 마.”

 

내가 형 미워하게 하지마.

 

“...그래.”

 

백현은 무슨 말이냐고 묻지 않았다.

 

 

 

 

 

16

 

백현이형, 은수누나랑 약혼할 거야.”

?”

 

종인이 들고 있던 머그를 조심성 없이 내려놓았다. 곧은 나무 같은 종인의 손끝이 팽팽한 걸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음 달 쯤에. 발표하고 바로 약혼식 얘기 나올 것 같아.”

갑자기 웬...”

왜 놀라.”

 

냉정하게 끊어내자 정적이 흘렀다. 세훈은 짐짓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일 것도 아니지. 다들 암묵적으론 예상하던 거였다고 했잖아. 그냥 변백현이 이기적이었던 것뿐이야. 결국 이렇게 될 거 지도 다 알면서.”

 

어제 본가에서 한달에 한 번 꼴로 있는 가족 저녁식사 후에 나온 얘기였다. 자식들이 회장의 건강을 묻고 서로 상투적인 안부인사가 오가는 식사가 끝나면 응접실에 모였다. 다과를 함께한 간단한 담소라곤 하지만 사실상 일가가 소집되어 둘러앉은 자리이고, 늘 그렇듯 감히 불참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회장.’

 

소회장, 회장은 백현을 그렇게 불렀다. 과히 살가운 투야 아니었지만 어찌 말하면 그마저도 그 강팍한 노인에게는 애칭이라고 볼 수도 있을 터였다. 흔히 젊은 날 무뚝뚝하고 제 자식이 귀여운 줄 모르던 사내들이 그렇듯, 노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장남인 백현의 아버지에 대한 부정도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손자인 백현에 대한 노인의 신뢰와 애정은 다른 사람들이 가늠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 일가의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수차례 회장의 크고 작은 언질에서 확인해왔다. 소회장. 작은 회장이라는 뜻이었다.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현선그룹의 몸통인 현선전자의 사장으로 백현의 아버지가 있었고, 백현에게는 부사장 자리를 내주었다. 에이, 회장님. 자꾸 그렇게 부르시면 민망해요. 백현이 몇 번 손사래를 치며 겸연쩍은 기색을 보여도 노인은 아랑곳 않았다. 누가 회장이랬니? 민망할 것이 어디가 있어, 안 그런가? 어때, 내 말이 틀려? 노인이 짐짓 목소리를 키우며 응접실의 긴 테이블에 둘러앉은 좌중을 돌아봤다. 아버지인 변석진 사장이 껄껄 호탕하게 웃기에 망정이었다. 열심으로 하라, 다 일구는 대로 결국에는 자네 것이 된다. 담배를 피울 때 조용히 따로 부르는 것, 어깨를 세게 쥐었다 놓는 악력. 그게 노인의 최대의 애정표현이었다. 아주 은근하지만, 모두가 알 수 있는 종류의 것.

 

이제 가정 꾸려야지. 은수양도 더 기다리게 할 수 없고. 젊은 처자가 무정한 사내 하나 때문에 여태 바라보고만 있질 않아? 그리구 그 댁 양친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는 거, 예의가 아니다.’

‘.......’

자네, 내 말 거스르는 적 없잖니. 뭐 부족할 것 없는 사람이, 어째서 기어이 결혼만은 못 하겠다는 이야기야?’

 

노인이 결혼과 자식 이야기를 들이밀기 시작한 건 이미 족히 10년은 된 일이다. 백현이 성인이 된 이후로 틈만 나면 이제 법적으로 성인이니 거리낄 것도 없질 않느냐며 별러 왔다. 우리는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르다, 기업가 집안에 있어 결혼은 중대사다. 시대가 변했다는 핑계는 노인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현은 나름대로 꿋꿋했다. 매번 완곡한 거부에 대한 서운함에 뒤따라 몰아치는 서릿발을 생각하면 퍽 대견하게 버텨왔다. 번번이 미뤄왔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일을 막 배우기 시작해서,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당장 가정에 충실할 수 있을지 몰라서. 노인도 때때마다 그 상황에 맞는 논리로 요모조모 융통성까지 발휘해가며 결혼이 가당한 사유를 들어왔다. 그 때마다 백현은 침착하게 설득했다. 매번 쉽지 않은 싸움이었고, 백현이 노인의 뜻에 반기를 들고 고집을 쓰는 건 꼭 그 하나였다. 이십대 후반에 들어선 이후로는 줄곧 아직은 일이 더 중하고 더 자리를 잡을 때까지 라는 게 유일한 방패막이였다. 저 집에나 잘 들어갈지 모르겠어요 회장님. 결혼은 해놓고 와이프 혼자 두는 것도 너무 멋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멋대가리 없는 놈 되란 말씀 아니잖아요. 회장님, 아이 할아버지- 끝내는 유들유들하게 굴며 아양으로 간신히 넘어왔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이제는 마음에 없어서 가 아니면 더는 핑계가 없을 단계에 이르렀다. 노인의 인내심에 바닥이 드러났고, 더 이상은 막다른 길이었다.

 

? 자네도 생각을 해봐. 내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나?’

 

번뜩이는 눈에는 여직 총기가 가득했다. 기력이 성성한 노인은 무릎위에 얹어져있던 백현의 매끈한 손을 덥썩 끌어다 잡았다.

 

변백현.’

네 회장님.’

내 장손, 변백현이. 이 변도섭이의 귀-한 장손. 증손주, 보게 해 달라.’

‘.......’

할애비 부탁인데, 대답 않는 거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자네를 많이 닮았으면 좋겠구만.’

 

마침내 체념색을 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세훈은 그가 고개를 떨군 것을 처음 보았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은. 늘 자신감과 여유만으로 빛나던 사람이 빛을 잃은 얼굴로 잠자코 앉아있었다. 머리에 맴돌았다. 낙담이라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다. 가져보지 못한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었다. 앞으로도 다시 두 번은 없을 것이다. 생전 결핍을 모르는 그 말간 얼굴을, 세훈도 사랑했다. 이기지 못할 암초에 부딪쳐 그렇게 괴로워하는 얼굴 같은 거, 변백현의 포기 같은 거, 상상도 해본 적 없다. 형이 그래선 안 되지. 그걸 나도 아는데. 체념이 짙은 그늘진 얼굴이 남아 가슴 한 구석을 먹먹하게 틀어막는다. 괴로웠다. 제게 안정감을 주는 사람,

 

어쨌든 그러니까 너도,”

 

그런 얼굴 하지 마.

 

제발, 종인아.”

 

저를 휘두르는 존재. 이렇게까지 등신 같이 굴 정도로, 앞뒤 없이 원해본 적 없단 말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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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는 부분 곧 나와요 분명한 건 아주 멀지는 않았어

  절정에 가기 너무 힘둘다 죽음의 트라이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