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의 연애 A
곰의 연애
매리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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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식은 낼모레인데 미리 불러다가 오리엔테이션씩이나 하고. 무슨 기숙사 배정 오티를 거창하게도 한다 싶긴 했다. 종인은 룸메이트 배정표를 받아들자마자 어이가 없었다. 하나, 둘, 세엣, 네엣… 와… 학번이 무려 다섯 개나 높다. 참나. 신입생을 복학생이랑 배정해주다니 이게 무슨 경우냐. 신데렐라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같은 과.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감의 말에 따르면 ‘단기적이고 단편적인 인연에 그치지 않고 서로 상승하는 좋은 멘토링 관계가 되라는 취지로 배정’이라는데. 고마워서 눈물 나겠네…. 종인은 입을 내밀고 속으로 할 수 있는 욕은 다 해봤다.
이 많은 사람 중에. 같은 나이의 신입생 친구도 많았을 텐데. 대마왕의 심술이야. A4용지 몇 장에 걸친 배정표를 앞뒤로 휘적거리며 애꿎은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을 때 눈앞에 턱, 짚어지는 손에 깜짝 놀랐다. 손이 꽤 예쁘다는 걸 알기도 전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봤다. 안녕? 남자가 아주 해맑게도 웃는다. 씨익 올라가는 시원한 스마일라인.
“잘 지내라잖아요 애기야.”
우웩. 소름이 돋았다. 급기야 초면에 애기야 라는 말도 안 되는 호칭으로 부르는 느끼하고 이상한 형이랑 어떻게 살지. 눈앞이 캄캄했다. 재수 없으면 변태일 지도 모르고!
그렇게 김종인의 캠퍼스 라이프는 처음부터 앞이 순탄치 않은 듯 했다.
1
다행히 순항인지 안 순항인지는 아직 몰라도, 적어도 신데렐라 버전은 아닌 듯 싶다. 왜냐면 나란히 입주한 종인의 룸메이트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침대 어느 쪽 쓸래? 하고 물었으니까. 종인은 잠시 정말 쏙 골라도 되나 한 번 겸양의 미덕을 발휘해야하나 고민하며 눈을 굴리다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 하는 남자의 선선한 얼굴에 냉큼 골랐다. 저 오른쪽 할래요.
종인의 룸메는 좋게 말해 친화력이 좋고 사실은 좀 너무 쓸데없이 친한 척을 해서 조금 부담스럽다. 저보다 키가 좀 작은데, 아무렇지 않게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처억, 어깨동무를 해서 종인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뭐야 이 형… 진짜 부담스러운 스타일이야. 더 나쁜 건, 조금 숨기지 못하고 어색해하는 티를 내도 전혀 개의치도 않는다는 거, 그래서 쭈뼛대는 건 오로지 종인의 몫이라는 거? 그 정도였다.
선배님이자 룸메이트의 이름은 변백현. 군필. 스물다섯. 경영대 12학번. 종인보다 학번이 꼭 다섯 개 높았다. 그리고 추가로 종인의 눈에는 복학생 오빠의 전형적인 매력(?)을 골고루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형이라고 불러. 완전 초초초면인데 대뜸 제 이름을 말해주고 그냥 형이라고 불러, 아저씨는 안 되고. 해서 종인은 그냥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았다. 약간 4분의 1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다행인 거라면 어쨌든 그의 붙임성 때문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서로 쳐다보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몇 개 없는 짐을 풀고 할 일 없이 앉아있다 같이 학교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갔다오기로 했다. 남자 둘이 사는데 어느 한 쪽이라도 살뜰하게 샴푸며 비누, 생필품 같은 걸 다 챙겨왔을 턱이 있나. 학교 앞 마트는 마트치곤 조그만 1층짜리라 뭐가 많진 않겠지만 그가 샴푸를 안 파는 마트가 어딨어~ 라고 말했기 때문에 따라가기로 했다.
종인은 매대를 따라 쭉 걸어가며 이것저것 집어들었다 내려놨다 했다. 한 두 걸음쯤 뒤에서 카트를 밀며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백현을 연신 돌아다보며 이거요? 이거? 저거? 하고 세 번은 물었다. 벌써 바디샤워를 고르고 치약을 고르고 이제 샴푸를 고르는 참인데 백현의 대답은 몇 번째 한결같다.
“룸메님 원하는 걸로 하세요―”
이것두 오케이. 저것도 오케이. 진짜 별로 안 중요해보이고 아무거나 룸메님이 좋으면 그걸로 하시란다. 사실 종인도 사회생활은 해본 적 없지만, 맨날 집에서 귀염만 받고 자랐지만, 그래도 나름 처음 대학교 들어왔다고 사회 초년생처럼 카트도 제가 끌어야 하나 눈치를 살짝 볼 뻔 했는데, 백현의 행동이 뭐든 너무 빨랐다. 아무렇지 않게 바지주머니를 뒤져서 동전을 넣고, 카트를 꺼내고, 손잡이를 야무지게 잡고 안 들어가? 하고 고개를 왼쪽으로 까딱 하기에 그냥 어영부영 들어왔다. 지금은 그 손잡이 위에 팔을 얹어 상체로 어슬렁어슬렁 밀고 있다. 그러니까, 좀 생각보다,
“아이 진짜! 형은 진짜 아무것도 관심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점이 있다. 종인은 원래 나름 친하다고 생각대면 잘 치대고 잘 삐대는 성격이지만, 편해지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데, 그러니까 낯을 제법 가리신다 이 말이다. 흥분해서 큰 소리도 내고 뗑깡까지 부리려면 좀 더 버퍼가 필요한 사람이고. 원래는 정말로 그랬는데, 만 하루도 안 돼 벌써 목소리를 높여버렸고…. 빽 소리쳐 놓고 스스로도 조금 뜨끔했다. 근데 정작 백현은 종인이 저한테 목소리가 커진 것도 감흥 없는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다만 그렇게까지 말하니 들여다보는 시늉이라도 해준다는 정도다. 여전히 흥미 없는 투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너 좋은 걸로 골라. 난 진짜 상관없는데? 아니면 왜. 고르기 어려워서 그래? 줘봐. 그럼 난 이거.”
하고 금세 콕 찍는다. 정말 생각해본 게 맞을까. 의문 삼기도 전에 어? 너랑 좀 닮았다. 하고 웃었다. 양 손에 들린 샴푸 두 개 중 그가 집은 ‘이거’에 그려진 동글한 곰 캐릭터. 제가 어린이도 아니고 그렇게 귀여운 걸 닮았다고 하다니. 우와… 종인은 좀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마음에 금방 또 빽 했던 게 누그러지고 잘 생긴 어깨가 움츠러든다. 진짜 모야… 이 형…
2
백현은 사람을 묘하게 말려들게 하는, 역시 처음 생각했던 대로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 뭔가 퉁을 놓아보려고 해도 유들유들하게 이 말 저 말 하는 통에 대꾸를 해주다보면 금세 쏙 그 페이스에 말려서 따라다니게 됐다. 썩 내키진 않지만 첫날부터 운명의 장난으로 이 느물거리는 그것도 무려 다섯 살이나 많은 복학생 형과 꽁꽁 짝지가 지어져버렸겠다 하는 수 없이 끌려 다녀 본 결과 몇 가지를 알게 됐다.
일단 좀 이상하긴 해도 생각보다 잘 해주고 못된 사람은 아닌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사람이다. 같은 경영대 같은 반의 선배이고, 이미 몇 년 전에는 과대였다고도. 그 때 아주― 경영대의 부흥기였지, 부흥기. 하고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넉살을 부리는데 종인은 우엑, 허세. 하고 질린다는 표정을 했지만 또 사실이 아닌 건 아니란다. 과 행사마다 그렇게 참여율이 좋았다고. 또 지금은 경영대 축구부 주장이고. 뭐야, 현역 뛸 때는 지나지 않았나. 미심쩍은 종인이 포지션 뭔데요? 하고 물었더니 나 레프트윙. 하고 대꾸한다. 골키퍼 아니에요? 저 고등학교 때 골키퍼 맨날 3학년 주장 형이 했는데. 그거 팀에서 제일 나이 많고 체력 딸리는 사람들이 뼁끼 치려고 그러는 거야. 형도 거기서 나이 제일 많잖아요. 하고 입을 내밀었더니 내가? 하고 전혀 모르겠다는 뻔뻔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제일 아니거든, 애기야. 하고는 또, 야, 너보다 많은 것뿐이지 나 아직 팔팔할 나이거든? 얘 진짜 큰 일 날 애네― 하고 요즘 애들 진짜 무섭다며 눈썹을 과장되게 축 늘어뜨리기도 했다. 엄살. 물론 종인은 들은 척도 안 했다. 하지만 그래도 좀 인정한다. 그쯤 되면 사기캐 아닌가 싶은데, 쪼끔 한심해 보여서 그나마 현실적으로 보인다는 거. 좀 한량 같아서 그 모든 잘난 점이 안 믿긴다는 점 빼고는 다 잘났다. 실제로 인기도 많은 것 같았다. 같이 다니면 인사도 많이 받고, 오빠 소리를 어디 복도 통과할 때마다 들은 것 같다. 원래 여자들이 장난 너무 많이 치는 사람 싫어한다구… 진중한 사람 좋아한다구… 언제 들은 거 같았는데 다 뻥이었나! 꽤 설득력 있는 정보원이 말해준 거였는데 약간 덕분에 세계관에 혼돈이 올 정도로…. 아 그러니까, 내 누나나 여동생이라면 소개해주기 싫은 점 빼고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뭐야. 우리 룸메 형아 따라온 거야?”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늘 이상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아니거든요. 그냥 신청한 거예요.”
입학식이다 뭐다 해서 수업을 하는 둥 마는 둥 보낸 첫 주가 지나고 강의실에 들어가 보니 또 백현이 있다. 맨날 보는 얼굴을 여기서 또 본다. 쫌, 여기서 또 볼 것까진 없는데. 눈 코 입 분포까지 외우게 생겼어. 뚱한 얼굴로 두꺼운 책을 품에 안고 들어갔는데 모르는 체 하려고 해도 계단식 강의실 한 가운데 줄에 무리를 지어 있는 통에 그럴 수도 없다.
“어쭈. 배짱 좋은데. 야 이거 고급회곈데 애기야.”
“할 수 있어요.”
하고 고집스러운 표정을 짓자 잔뜩 귀여워하는 표정으로 웃어버린다. 웃겨. 애기 취급하는 것 같은데 종인도 다 알고 신청한 거란 말이다. 커리큘럼도 얼마나 꼼꼼히 다 읽어보고 얼마나 힘들게 일찍 일어나서 수강신청도 했는데. 나름 자신 있었다. 3학년 이상 권장 수업이라고 써있지만 나름 한 뚝심 하는 걸. 물론 백현도 그랬겠지만 저도 이 학교 들어오려고 열공한 만큼 은근 내공이 있다 이 말씀이다. 하고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었더니 백현이 푸스스 한다. 누구야? 백현의 무리 중 한 사람이 묻고 어깨가 당겨졌다.
“내 룸메. 귀엽지.”
했더니 몇몇이 동조하며 응 귀엽다, 하고 답하기도 하고 누구는 잘생겼다고도 말해줬다. 종인은 백현이 이렇게 자기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마다 쑥스럽고 괜히 쭈뼛해진다. 귀엽지, 하고 말하는데 누가 ‘안 귀여워.’라고 하겠어? 진짜 민망한데 백현은 매번 되게 귀엽지, 하고 말한다. 결국 좀 미덥진 않지만 백현을 따라가 자의반 타의반 엉겁결에 가입하게 된 축구동아리에서도 운동부 특유의 짓궂은 야유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리니까. 또 유난히 어려. 귀엽지 않냐?’ 뺨을 꼬집던 손에 얼굴에 열이 올라서 파닥파닥 쳐냈던 아주 불운한 기억이 있다. 백현보다도 한 뼘은 더 큰―그리고 훨씬 아저씨 같은―다른 선배들의 ‘야, 백현이 형 애기래. 룸메.’하던 소리도 생생하다. 우웩.
어디 가, 너 독강이지. 보나마나지. 이걸 1학년이 누가 듣냐. 하고 잡는 통에 결국 탈변백현 시도는 무산되고 언저리에 눌러앉았다. 수업 때 말 걸면 이씨, 말 걸지 말라니까. 하고 구박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백현은 수업이 시작되자 조용해졌다. 나름 필기도 전국구는 아니어도 좀 깨작깨작 하고 수업도 열심히 듣는다. 뜻밖의 면모에 필기를 하다말고 교수를 바라보는 옆얼굴을 훔쳐보고 있으려니 교수가 마무리 공지를 시작했다.
“자아, 이번 학기는 시범적으로 태스크 포스 형태를 시도할 거야. 2주에 한 번 대학원 회계 수준의 굵직한 문제들을 배분할 거고, 팀끼리 풀이를 하세요. 팀 과제의 비중은 약 40프로가 될 거고. 각자 자발적으로 팀을 구성해서 나한테 다음 수업 시작 전에 제출하세요. 모여서 얘기들 해보시고 수업은 여기까지 합시다.”
회계 수업에서 팀플이라니. 원래 수업 안내에는 없던 얘기다. 종인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백현 말마따나 당연히 독강이고, 회계원리나 기초과목 같은 건 동기들과 우르르 모여 듣지만 이건 진짜 혼자인데. 그래도 상관없을 줄 알았다. 문제풀이가 위주고 시험으로 결정이 나는 과목이니까. 말했다시피 종인은 낯가림이 있는 성격이고, 꼭 그게 아니래도 다 삼삼오오 아는 사람인 것 같은 분위기에서 아무에게나 먼저 말을 걸어서 같이 팀을 하자고 하기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냥 좀 교수님이 알아서 정해주지. 멀뚱히 서서 눈치를 보고 있는데 누가 옆에서 팔을 휙 잡아당겼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는데, 손의 주인은 이제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백현이고.
“얘도 같이 하자.”
어깨동무를 한 채로 멀뚱멀뚱 백현의 조원들을 보며 서있는데, 솔직히 뻘줌했지만 정말로 대안이 없었다. 딱히 좋다는 건 아니지만, 팀플을 못하는 것보다는 오지랖 대마왕이라두 변백현이 낫잖아. 백현은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 있고 대부분 수긍하는 분위기인데, 한 명이 탐탁찮은 얼굴로 말했다. 대학원 문제라잖아. 1학년은 좀 그런데.
“종인이는 똑똑해서 괜찮아. 그치.”
백현이 물색없이 곧바로 받아쳐도 그는 영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깐깐하게도 생겼다. 치. 종인은 입을 대발 내밀었다 저를 훑어보며 안경을 한 번 고쳐쓰는 그와 눈이 마주치고선 곧 쑥 집어넣었다. 백현이 타이밍 좋게 덧붙였다.
“야. 정 안 되면 내가 업어 키울게. 됐지?”
니가 책임지는 거다, 라는 식의 마지막 뒤끝을 끝으로 그럭저럭 넘어갔다. 백현이 야, 내가 챙겨줘서 좋았지? 라던가 또 잘난 척을 하면 그 김에 묻어서 이건 좀 고맙긴 해요―라고 말해보려고 했는데 백현이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아서 어물쩍 넘어가버렸다. 에이, 말해버렸어야 되는데. 또 이럴 땐 말을 안 해. 말하지 말랄 땐 엄청 장난치고. 이럴 땐 입 싹 다물고.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 뭐 먹을래. ○○치킨? 네. 그래도 이번 거는 좀, 꽤 고마웠다고 해야 되나.
3
“형, 근데 여자친구 없어요?”
백현이 사준 치킨을 우물대며 냠냠 먹어치우다 불쑥 물었다. 닭다리를 두 개나 먹고 난 뒤였다. 난 다리 잘 안 먹어. 피자파야. 애기 많이 드세요. 하길래 사양 않고 냉큼 두 번째도 쫄깃한 살이 올라붙은 다리를 집어들었다. 피자파라니까 괜찮겠지! 입에 욕심껏 밀어넣은 다리를 우물거리면서 치킨 한 조각을 더 집어들곤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형 여자친구 없어요?
“엉, 없는데?”
입가에 양념을 묻힌 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백현이 대답은 건성으로 하면서 두루마리 휴지나 뜯어서 주는 통에 그제야 알았다. 건네받은 휴지로 입 주변을 벅벅 문댔다.
“왜요? 인기 많잖아요. 쫌… 이해는 안 되지만 그래두.”
하는 말에 백현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호탕하게 웃은 바람에 라운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쳐다볼 지경인데 눈물이 쏙 빠지도록 웃는다. 허리를 접고 눈까지 찡그리며 웃었다. 그렇게 웃긴가. 뚱한 얼굴로 치킨 한 입을 더 물자 간신히 웃음을 그친 백현이 말했다.
“너 진짜 골 때린다. 그렇게 대놓고 솔직하기야?”
“아니 뭐….”
“아― 나 진짜 상처받았어, 애기야.”
화살 맞은 이순신 장군처럼 가슴을 쥐고 오버액션을 또 하신다. 치킨도 사주고, 닭다리도 두 개 다 먹게 해주는 사람한테 너무 심했나, 라는 생각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글쎄. 꼭 누구랑 연애를 정해놓고 해야 하나?”
하고 대답하는 백현이 갑자기 진지해보여서 종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얼굴을 찬찬히 보니 아직까지 입가에 웃음기는 남아있지만 마냥 장난을 치는 건 아닌 거 같다.
“형은 그럼 한 명만 진지하게 사귀어 본 적 있어요?”
“진지하게? 잘 모르겠네…. 한 명씩만 만나긴 했지.”
“그럼 진지하게 만날 생각 없어요?”
“지금은 딱히.”
아니란 대답을 당당하게도 한다. 아무리 인간이 입체적인 존재라지만 변백현은 해도 너무 하다. 정말 좋은 사람인지 나쁜 놈인지 시도 때도 없이 헷갈린다. 종인의 상식으론, 그래두 결혼을 꼭 하진 않더라도 언젠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 사랑하고 싶은 법이 아닌가!
“그럼 결혼은 어떻게 해요?”
“글쎄. 음,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물론 종인도 대학에 오면 좀 더 다이내믹하고 문란한(?) 라이프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쪼오끔 기대는 했지만. 그래도 대체로는 이상적이고 그림 같은 사랑을 꿈꿨다. 대학생이 될 걸 생각할 때마다 그런 상상을 했다. 몽글몽글하고 예쁜 사랑을 하고 싶다는 그런 거. 같이 벚꽃이 만개한 캠퍼스도 걸어 다니고, 잔디에서 피크닉도 하고, 놀이공원도 가고, 도서관에서 같이 시험공부도 하고. 그런 거였다. 목표하는 대학 이름을 독서실 책상에 꽝꽝 붙여놓고 꾸벅꾸벅 졸면서 상상했던 캠퍼스 연애는 그런 거였다. 너무 착하고 뭘해도 예쁘고 뭐든지 같이 하고 싶은 여자친구가 너무 좋아서 같이 결혼도 하고 애기 몇 명 낳을까 상상도 하고 그런 거잖아. 너무너무 졸리고 그냥 자고 싶고 관둘까 싶을 때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버티게 하던 로망이었는데. 백현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거다.
“결혼은 형이 이미 했으니까. 아 맞다, 나 조카 있는데. 볼래?”
“…….”
“예쁘지. 딸이야.”
팔불출처럼 휴대폰을 꺼내 아기 사진을 보여줬다. 얄밉게도 제 로망을 와장창 깨는 소릴 해버려서 미운 마음에 입이 이만큼 나왔었는데, 사진을 보자마자 그게 쏙 들어갔다. 와아. 완전 귀엽다…. 종인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천사 같아요. 하얀 찹쌀떡 같이 피부도 고운 아기의 웃는 얼굴이 사랑스럽다. 촉 처진 눈매가 백현을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인정하긴 싫지만 백현은 좀 귀엽게 생겼다. 저렇게 얄미운 말만 하지만 얼굴은. 하지만 말은 안 해줄 생각이었다. 아기의 가지런한 속눈썹이 백현을 닮은 것 같다는 얘기도. 근데 이런 애기 보면 나중에 막 애기 낳구 싶지 않아요? 저는 낳고 싶은데. 일단 두 명이요. 딸도 예쁘구, 아들도 좋으니까. 하나만 있으면 아쉬우니까 두 명 낳구. 나중에 또 생기면 아들딸 상관없이 셋 낳아도 괜찮구.
“어이구. 그래쪄요?”
“뭐야, 또 애기 취급 하구.”
“그런 거 아닌데. 근데 너는,”
눈이 마주치자,
“넌 꼭 진―짜 좋아하는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
턱을 괴고는 나머지 한 손을 뻗어 머리통을 푹 누른다. 그 때 백현은 좀 어른 같이 웃었다. 순간 조금 두근거렸다. 아씨, 두근? 이 아닌데. 번지수가 좀 잘못 됐는데. 종인은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잡귀야 물렀거라.
4
“이게 뭐에요?”
책가방을 한 아름 끌어안고 졸기 직전이던 눈앞으로 쓱 들이밀어진 손에 그만 화다닥 잠이 다 깼다. 존 적 없는 것처럼 표정관리를 하며 슬쩍 보자 노트 정리다. 백현과 같이 듣는 수업의 쪽지시험이 바로 낼 모레였다.
“요약정리. 책에 쓸데없는 거 많더라. 그것만 대강 훑고 들어가도 될 거 같은데. 너 뭐 다른 거랑 겹친다며.”
“…형 공부 꽤 한다던데.”
“뭐, 나름대로.”
그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한다.
“믿어줄게요. 완전 의외긴 하지만.”
“얼씨구. 은인도 몰라보고 말하는 것 좀 보게.”
너 아직 한 번도 다 안 봤지. 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하는데 조금 찔렸다. 축구도 같이 했고, 동아리 술모임도 같이 나갔고, 놀기도 같이 놀았는데 백현만 대체 언제 한 걸까. 이해가 안 돼. 그래도 내밀어진 노트는 마다 않고 꾸물꾸물 챙겼다. 생각했던 것보다 글씨가 옹기종기 귀엽다. 뭐든지 느물거리고 대충대충 편하게라 글씨도 휘갈겨 쓸 줄 알았는데.
“얌마. 너 귀여워서 봐준다.”
“…….”
“내가 귀여운 거에 좀 약해서.”
하고 짓궂게 웃는다. 참나― 여자후배한테나 하면 먹힐까 말까 한 짓을. 아니다. 오히려 요즘 같은 때 여자애들한테 저랬다간. 이렇게 아저씨 같은 멘트나 치는데 어디가 좋다는 거야? 저렇게 느끼하게 웃고. 종인은 제 어깨를 한 번 꾹 쥐고 창가 쪽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백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그간의 정을 봐서(?) 신고는 안 할 거지만 진짜 저질….
5
수업이 끝나고 백현이 제 친구들과 왁자하게 몰려 있기에 쏙 먼저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얼른 바글바글한 복도부터 벗어나려는데, 어느 틈에 따라온 백현이 부른다.
“어디 가?”
“남이사요.”
뒤를 힐끔 돌아봤더니 백현만 잠깐 빠져나왔는지 친구들이 저만치 이쪽을 보며 서있다. 왜 굳이 또 쫓아왔나 모르겠다. 형 친구들 저기 기다리는데. 절루 가요.
“얼씨구. 왜 기분이 이렇게 별로지. 쪽지시험 잘 못 봤어?”
“아니거든요― 잘 봤어요.”
“잘 봤는데 왜 그래. 오늘 몇 시에 들어오나 물어보려고 했더니.”
“아 형이 무슨 내 보호자도 아니구!”
순간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가 스스로 당황했다. 짜증낼 건 아니었는데, 저도 백현한테 기분 상한 거 하나도 없었는데 순간적으로 그랬다. 정말 예정에 없던 거라서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백현이 말이 없다. 그렇게 잠깐 황당한 표정이었다 픽 한 번 코웃음을 치고는 묻는다.
“왜 또 짜증을 부리고 그래.”
혼날 줄 알았는데, 어린애를 다루듯 누그러진 말투에는 그만 못 이기고 있는 그대로 실토를 하게 된다.
“배고파서….”
어이없어 하던 그가 그 길로 학관 밑에 있는 카페테리아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사설업체에서 상시 운영하는 여기는 그래도 다른 보통 학식보다 좀 맛이 있는데, 항상 두 가지 중에서 메뉴 고민을 하게 된다. 오늘은 A세트는 오무라이스 김치볶음밥이고 B세트는 돈까스랑 우동이다. 약 1분 고민 끝에 B를 골랐더니 백현이 앞에서 계산을 했다.
“근데 형은 앙 머거요?”
일단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본능에 충실했다. 한참 열심히 먹고 배가 반쯤 차니 제 앞에 팔짱을 끼고 저 먹는 걸 구경하는 백현이 보인다. 오무라이스가 아몬드 모양으로 예쁘게 말린 그대로였다. 안 그래도 끝에 조금 뺏어먹으려고 했는데. 돈가스를 입안에 잔뜩 넣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왜 안 먹어요?
“나는 먹었지, 바보야. 세 신데.”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턱 끝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킨다. 백현의 말대로 시계바늘이 세 시에 가까웠다. 쪽지시험 보기 직전까지 그가 준 노트를 한 번 더 읽고 가느라고 미처 점심을 못 먹었더니, 시간 감각이 없었다.
“근데 왜 시켰어요?”
“둘 다 먹고 싶다며.”
“내가 언제.”
“못 고르고 있길래.”
그리고 나온 대답에 그만 입이 슬쩍 벌어졌다. 그 얼굴을 보고 그가 웃는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밥도 안 먹고 배고프다고 성질을 부려 못난아.”
“…….”
못난이 아닌데. 언제는 귀엽다고 해놓고. 우물대며 마저 씹자 불어터진 빵빵한 뺨을 손등으로 톡 눌렀다. 맛있냐?
“…….”
갑자기 거짓말처럼 입맛이 없어졌다. 이상하다.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백현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좋은 사람이다. 그 대신 백현은 솔직하다.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졸라도, 아니라고 얘기해주진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서운하지만, 또 그래도 대체로 다정한 사람이다. 정말 이상하다. 종인의 상식으론 아직 잘 이해가 안 됐다. 흑백으로 사람을 나눌 수 없다는 것쯤은 저도 안다. 알지만. 이렇게 친절한 사람인데,
왜 사랑을 모른다고 말하는 걸까.
***
(애기)곰의 (첫)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