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매리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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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건 분명했다. 이래서 단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 말은 들어야한다는 거다. 캠퍼스 커플이든, 컴퍼니 커플이든 간에 여간 CC 붙는 건 뭐가됐던 하지를 말라고. 보기 싫어도 계속 봐야할 사이에는 좌우간 붙어먹는 게 아닌 법인데. 안 듣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C.C’는 면했는지 몰라도, 어느 때는 불타는 열정과 욕정이었다가 이제는 얼굴만 봐도 밥이 얹히고 목이 막히는 사이래도 같은 솥에 밥줄이고 인생이고 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건 매 한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점잖은 척 쿨한 척 좋은 이별이란 게 있기는 있다고들 말도 하는데, 어쨌든 종인은 백현과 좋은 이별은 못했다. 안 좋은 이별을 했다. 더 정확히 말해 아주 후진 이별. 끝나고도 앙금이 남고, 그러고도 얄밉고 싫어도 얼굴은 봐야 되고, 서로 냉담한 주제에 그게 원망스럽고 배알이 꼴리는. 종인은 그 후진 이별의 책임이 저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백현에게도 책임이 있다. 물론 팩트만 놓고 볼 때, 먼저 다른 사람이 생긴 쪽은 종인이었다. 하지만 먼저 권태기라는 말을 입에 올린 건 백현이었고, 책임을 일부 미룰 여지를 줬다. 그 즈음 섹스가 현저히 줄었다. 가끔 소파에 나란히 앉아 EPL 경기를 보며 캔맥주를 까다 분위기가 조성돼도 페팅 정도가 고작이었다. 귀찮을 정도로 끈질기게 들러붙어 오는 건 원래 성격인 줄로 알던 때가 있었다. 몇 번을 쏟아내고도 금세 목덜미에 코를 묻으며 엉덩이를 만지는 손길에 미련이 뚝뚝 묻어나던 때가. 그럴 때면 백현의 강아지 털 같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어깨와 쇄골께를 간질어서, 조르는 듯한 행동에 못 이긴 듯 내어주곤 했다. 그 기간이 그렇게 짧았던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그게, 수명이 짧은 열정이라거나, 연애 초기의 성의 같은 거라곤 의심 안 했다. 같은 집에 있으면서 서로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원래 없던 일은 아니었다. 그러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키스를 했고, 그게 진해지면 하던 일의 모든 잔해 위에서 사랑을 나눴다. 대화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불편하진 않았다. 백현과 종인 모두 각자 나름의 예민함이 있었지만 음악을 업으로 한답시고 불규칙하고 예측가능성이 낮은 생활을 하는 것치곤 무던한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연애는 어디까지나 두 사람 중 누구도 달리 의도하진 않은 섬세한 균형이었다. 그리고 종인은 어느 날 침실에 뒤늦게 들어왔을 때, 잠에서 깨지 않는 백현의 옆얼굴을 봤다. ‘, 만나보고 싶은 사람 생겼어.’라고 말했을 때 백현의 표정이 어땠더라. 잠깐 멈칫한 기색이었다가, 금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그래. 알았다.’라고 대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변백현도 어디까지나 저 혼자 악감정이 남은 양 냉정하게 굴 것까진 없다는 거다.

 

찬열과 함께 연습실로 들어갔을 때는 난리도 아니었다. 실내에 담배연기가 자욱하고 칼칼하고 매캐한 냄새가 훅 끼쳐들었다. 게다가 방음을 한답시고 전면이 거울인 한 벽을 빼곤 삼면에 온통 방음벽을 두른 탓에 더했다. 그 난장판의 한 가운데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앉은 백현은 악보를 들고 건반 앞에 앉아있었다. 알만 했다. 왁스를 하지 않은 멋대로 마르게 둔 머리. 자주 입는 후드가 묵직한 회색 후드티에, 뭐가 마음 같지 않은지 짝다리를 짚은 한쪽 다리를 떨고 있었다. 이렇게 밀폐된 데서, 창문도 열지 않고.

 

, 너는. 보컬이라는 새끼가. 무슨 담배를 이렇게, 어우.”

 

찬열이 성큼 들어서며 커다란 손을 휘휘 허공으로 내저었다. 정작 백현은 요란한 등장에도 흘긋 넘겨다보고 말았다. 문이 열릴 때 순간적으로 무심한 눈길이 찬열과 뒤따라온 종인에게 닿았다가 들여다보고 있는 악보에 코를 박았다. 수선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제 절친에겐 성의 없는 눈짓 한 번이라도 아는 척을 한 것 같지만 저는 쌩 깐다. 솔직히, 종인은 일부러 피하는 것 같지도 않게 무심한 눈으로 봐놓고 아무 것도 안 본 사람처럼 무시를 하는 게 더 별로였다. 그렇다고 아주 모른 척을 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어쨌든 같은 멤버였고, 할 말은 해야 했다. 필요 없는 말은 안 할 작정인가 보았다. 하여튼 차별을 떠나서 저와 헤어진 이후 변백현이 답지 않게 과묵해진 건 사실이었다.

 

빡찬, 일로 와봐. 어제 니가 여기 싸비 딴 거,”

 

악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건네는 말에 찬열이 포르르 백현이 앉은 옆으로 넘어갔다. 찬열은 저들 중에서 덩치가 가장 큰데도 불구하고, 몸집이 커다란 강아지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귀여운 펌을 한 포슬포슬한 머리. 백현은 이야기에 집중하자 습관적으로 새 담배를 꺼내 집어들었다. 저건 습관이다. 찬열과의 신곡 얘기가 심각해 금세 불 붙이지도 않을 담배를 빈 손에 끼고 톡톡 건반 위를 두드렸다. 하기는, 백현은 종인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주 골초였다. 비흡연자인 종인이 그와 연애를 하면서 그나마 많이 줄었었다. 어떤 때는 구박도 하고, 때로는 투정도 하면서 결국 담배를 필 땐 제 눈치를 보게끔 했지만, 그래도 아주 끊게 하지 않은 건 솔직히 좀 물렀던 부분이 있다고 종인은 생각했다. 비흡연자로서 동경 같은 게 분명 있었다. 면박을 주면서도 가끔은 설레어서. 제 눈치를 보며 두 개, 아니 한 개만. 하며 손가락을 고쳐 접는 게 좋아서. 아주 끊으라곤 말 못했다고 종인은 인정한다. 그게 조금은 아쉬웠던 때가 있었다. 예전에. 그리고 금연을 당위적으로 강요하거나, 눈치를 줄 사람이 없어서인지 백현은 저들이 헤어진 이후 다시 담배가 늘었다. 특히 요즘 같아선 끝간 데도 없는 골초.

 

요새 한참 공연도 뛰면서 동시에 음반도 내려고 준비하는 와중이라 백현뿐만 아니라 다들 정신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특히 미루고 미루다 못해 졸업반 중에서도 아주 끝물이라고 나름대로 학점까지 챙기고 다니는 민석은 종인은 안 그래도 뾰족한 얼굴이 더 핼쑥해있었다. 종인은 그나마 멤버 중 가장 어려 여유가 있는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군대에 가지 않은 여동기들은 어느 새 졸업반인 그런 나이다. 어느 새 3년째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취미로나 하는 게 좋을 거라고도 하고, 자칫 잘못하면 밥 굶기가 십상이라고도 쉽게 말하는 음악이란 걸 학점보다 취준보다 먼저 두기로 하고 이렇게 모이게 된 게. 그래도 불확실한 와중에 이럭저럭 해왔다고 자부했다. 그래봐야 언더그라운드였지만, 그래도 꾸준히 작은 공연장을 빌려 공연도 해왔고, 운이 좋으면 가끔은 꽤 큰 무대도 서봤다. 넓은 공연장에서 꽤 벅찬 숫자의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가슴이 뛰었고, 라운지 같은 데서 노래를 할 때도 그럭저럭 괜찮은 기분이었다. 종인은 연습실 한켠에 고이 모셔둔 제 악기를 꺼내 조심스레 만졌다. 본격적인 합주는 민석이 와야 시작할 테고, 솔직히 이 정도면 저를 포함해 모두가 이미 여기에 밥줄을 건 셈이라 생각한다. 발을 빼기에는 좀 늦은 감이 있다.

 

발레를 그만두고는 적당히 성적에 맞춰 대학에 진학했다. 과는 독어교육과였다. 물론 종인의 엄마는 여직 그냥 어떻게든 공부해서 얌전히 임용고시나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 이야기 한다. 그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고, 꽤나 순정적으로 이미 너무 깊게 발을 담갔다고 말이야 하지만 정말 아무 것도 안 보였다면 진작에 그만 뒀을 거였다. 하지만 밴드는 이제야 막 빛을 보려는 참이다. 나름 언더에서 하면서도 저들 스스로 평가하기에 꽤나 꾸준해서, 우리 좀 될 것 같은데? 라고. 조금은 우쭐하고 부풀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최근 한 기획사에서 진지하게 정식 데뷔 제의가 들어와서 얘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아직 지나치게 초기 단계의 논의라 어떻게 될지 불확실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여간 기회는 기회였다. 솔직히 음악성도 있지만, 이런 기회를 만나게 된 데에는 멤버들의 비주얼이 더 컸을 거라는 건 멤버 전원이 어느 정도 인정했다. 어디까지나 대중화, 상품화에 유리한 건 스타성이고 어떻게 또 그렇게만 쏙쏙 골라서 모아놨는지 의아할 정도로 괜찮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골수팬도 꽤 많았다. 일반 대중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이 바닥에서 잔뼈 굵게 밀어부쳐왔고 공연마다 따라다니는 사람도 제법 됐다. 물론 따라다닐 정도의 골수팬은 대부분 여자라는 것도 부정할 생각은 없는 부분이다.

 

종인은 다리가 예쁜 베이시스트였다. 적어도 팬들 사이에선 그렇게 통했다. 주로 마이크를 잡는 백현에 의해서 처음 그렇게 불렸고, 그 이후로 주욱 그랬다. 때로는 백현의 기분에 따라 허벅지가 끝내주는 베이시스트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객석이 더 뜨거워졌다. 백현은 손이 예쁜 보컬리스트. 백현이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한 적은 없지만, 노래에 취해 스탠딩마이크를 감싸쥐는 손이 그림 같다는 걸 사람들은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불렸다. 그래도 이 바닥에선 나름 아이돌이라 팬들에게는 저들간의 브로맨스가 열광의 포인트가 될 때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게, 백현이 정말 제 엉덩이며, 허벅지, 종아리까지 샅샅이 그 손으로 만져보고 하는 말이라는 건 꿈에도 몰랐을 거다. 저녁 공연에, 앵콜에, 뒤풀이에 언제 녹초가 됐었냐는 듯 방에 들어서자마자 부둥켜안고 키스를 했다. 제가 셔츠 단추를 푸르면, 청바지를 발끝까지 성질 급하게 밀어내며 저를 침대로 밀었다. 제 옷을 벗겨내는 손은 아주 빠르고, 보통은 이미 뒤풀이의 술기운에 둘다 적당히 얼큰하게 취해있어서, 백현이 제 몸을 꿰고 들어올 때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어제도 했잖아. 괜찮을 걸... 내가 괜찮은데... 말끝을 늘이며 목을 끌어안으면 못 참겠다는 듯 몇 번이나, 크게 움직였다. 괜히 그렇게 말했나. 다른 사람들이 관심 갖고 볼 거 아냐. 싫은데. 아니야 그래도, 이렇게나 멋지고 예쁘다고 자랑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고, 제 온몸 가장 구석구석까지 찍어누르던 젖은 입술도.

 

아무도 몰랐고, 몰라야 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뭐 그런 것들이다. 원래 지나온 사랑이란 그렇다. '현재'라는 이름에게 자리를 내어줘야 하고, 잊혀져도 항변할 권리 없는. 오히려 완전히 잊혀지거든 더 쿨하고, 멋졌고, 뭐 그 정도면 간신히 선방은 했을. 고작 그 정도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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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인은 회사원이었다. 처음은 기분전환을 시켜주겠다는 지인을 따라갔던 바에서였다. 맹세컨대, 그 날 바로 자거나 하진 않았다. 분위기가 좋았고, 간지러운 대화도 몇 마디 나눴고, 아닌 척 모호한 시선을 섞었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눈가리고 아웅이래도 좋았다. 그것도 바람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은 지켰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싶었으니까. 서운하고, 빈정 상하고, 속 뒤틀리는 것 투성이였는데 그래도. 그 순간에 지랄 맞게 변백현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서 못했고, 다행히 그 정도는 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도도한 척 다음으로 미루고 돌아설 수 있었지만 그 새벽 다시, 저들의 공간의 문을 열고 개선 없는 외로움과 마주했을 때 눈물이 났다. 너는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줄까. 언제 그렇게 됐을까. 아쉬워졌다. 그는 백현이 주지 못하는 것들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 남자였다. 확인해보니 정말 그랬다. 어른스러운 사람이었고,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인이 하고 있는 음악이나 밴드에 흥미와 관심을 갖고 대해주는 이해심 많은 사람이었다. '근데, 무슨 힘든 일 있어?' '왜요?' '왠지 울 것 같은 표정이어서.' '울면, 어떻게 해주게요?'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였다. 일부러 더 가볍고 천박한 투를 꾸미며 흘린 은근한 투에,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최선을 다해서...'와 같은 말을 쓰던. 그래서 그에게 안겼다. 많은 변명들을 생각했지만, 정작 백현에게 그걸 말할 기회는 없었다.

 

어쨌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난다는 걸 백현을 포함해 밴드의 멤버들은 알고 있었다. 종인은 민석과 찬열을 많이 좋아하고, 특별히 저를 판단하지 않을 거란 신뢰 정도는 있었지만 그래도 백현과 저와 동시에 엮여있는 사람들이기에 자세한 얘기는 불편했다. 대충 직장인이고 연상이라고만 둘러댔다.

 

처음 백현과 연애를 시작했을 때, 얼마 안 돼서 민석과 찬열에겐 알렸다. 정확히는 '알렸다'기보다는 일종의 감히 말하지 않는 의심 같은 것을 받았을 때, 변백현이 순순히 인정했다. , 우리 사겨. ... 대강 너네가 여친이랑 하는 그런 거 다. 집 합칠까 하고. 그 때 모두가 이미 소주를 몇 병씩 까고 안주를 아무렇게나 펼쳐놓은 연습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너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땅콩을 집어먹으며 말해서, 민석과 찬열이 동시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던 걸 종인은 기억했다. 종인은 그 때 백현의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마른 오징어를 씹었다. 애매한 얼굴로 딴청을 피우긴 했지만 뜻하지 않은 때 본의 아닌 커밍아웃 때문은 아니었다. 대충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오픈하고 나니 조금 민망해서였다. 백현은 숨기자고 하면 눈치 없이 굴만큼 둔한 타입도 아니었지만, 기면서 아닌 체 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쪽은 종인이 좀 더 강했다. 굳이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까지 숨겨야할 이유를 몰랐고, 부러 변명을 해가며 무마해야할 순간들을 생각하면 좀 답답했다. 믿음이 있기도 했지만 그 때는, 요즘 세상에 게이 정도는 나름 예술한다고 나대는 놈들의 특별한 성벽 쯤으로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나이브한 생각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모르는 게 없으니 그 정도는 괜찮았다. 그 둘은 지금도 백현과의 처음도, 끝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그들은 그렇게 저와 백현의 눈치를 봤다. 중간에 껴서 어쩌지도 못하고 입맛만 다시는 때가 많아졌다. 지금 같은 때가 바로 그렇다.

 

"... 형들. 오늘, 승민 형이... 우리 공연 보러오고 싶다고 하는데. 아마 인사하려고 할 거야. 미리 말해야 될 것 같아서. 알고 있으라구. 그리고 인사하면 잘 받아주구...."

 

공연은 30분 뒤다. 마지막 연습도 끝냈고, 이제 남은 거라면 개인적인 목풀기 정도일 거였다. 공중파를 타는 것도 아니고, 젊고 자유롭고 편견 없는 영혼이 들끓는 거리의 한 클럽에서 이 정도 규모의 공연은 새삼스러울 것까진 못된다. 사실, 백현에게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뿐이지 딱히 백현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찬열과 민석에게만 한 말이었고 솔직히 백현이 그와 인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건 종인이 생각해도 오버였다. 하지만 승민은 모른다. 알지 않는 편이 좋았다. 백현이 전 애인이었다는 건. 그냥 잠깐 만났어, 예전에. 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당연하게도, 아무 유감없는 그가 백현에게도 인사를 할테고, 종인으로선 그냥 별나게 이상한 기류라던지 불편함만 서로 모르고 지나갔으면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민석이 힐끔 눈치를 살폈고, 찬열은 처음부터 약간 안절부절하는 기색이었다.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어색했던지 너털웃음을 지으며 명랑하게 말을 꺼낸다.

 

"어어, 당연히- 인사해야지!"

 

목소리가 너무 컸다. 과장되고. 그 말이 끝나고, 민석이 별 다른 맞장구를 치지 않자 더 큰 정적이 찾아왔다. 필연적인 거였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한숨이 났다. 진짜 쓸데없다. 이런 거. 백현은 별 말이 없었다. 찬열과 민석이 눈치를 보는 게 무색할 정도로 표정변화가 없었다. 백현이 민석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 담배. 하고는 밖으로 나가는 백현을 민석이 따라 일어난다. , 우리 담배 한 대 피고 올게. 너네도 금방 나와. 거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30분 뒤에 바로 무대에 설 보컬이 담배 타령이라니. 팀 꼴이 아주 잘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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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은 백현은 여전히 목청이 좋았다. 흰 반팔티셔츠에 물빠진 청바지, 스니커즈를 신고 액세서리라곤 은색 팔찌 하나밖에 하지 않은 백현은 아직도 소년 같다. 방금 전까지 줄담배를 피고 뛰어들어온 사람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거다. 비단 백현 뿐만 아니라 멤버 모두 무대에 오른다고 해서 요란한 옷을 입는 적은 없었다. 종인은 대체로 니트 한 장에 스키니진, 워커 또는 로퍼가 다였고 민석은 심플하고 간편한 걸 좋아해 무채색을 돌려입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독특한 걸 좋아하는 찬열이 가끔 눈에 띄는 희한한 옷을 가끔 선보이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제일 뒤에서부터 먼저 소개할게요. 원걸 소희보다 더 예쁜 드러머 김민석,"

 

민석이 스틱을 공중에 가볍게 던졌다 다시 잡는다.

 

"프린스 인 원더랜드 최장신 기타리스트 박찬열!"

 

그러고보니 오늘 찬열이 마치 어린왕자 같기도 한 길고 펄럭이는 옷을 입긴 했다. 제 이름이 불리자 돌아보는 백현을 향해 가지런한 이가 다 보이게 활짝 웃었다.

 

"모델처럼 잘생긴 베이시스트 김종인, 그리고 저는 눈웃음이 매력적인 보컬 변백현입니다. 반갑습니다-!"

 

종인을 소개했을 때 객석에서 아쉬운 함성이 들렸다. 누군가 목소리 큰 사람이 소리쳤다. 다리가 예쁜 베이시스트! 예쁘다! 누군가는 분명히 종인을 따라다니던 수식어를 기억한다. 꽤 많은 사람의 뭉쳐진 목소리가 다리가 예쁜 베이시스트를 연호했다. 백현이 마이크에 대고 소리내어 웃는다.

 

"아하하. 우리 공연 자주 오신 분들이 많네요. 근데 제가, 레퍼토리를 바꿨어요."

 

백현은 금방 화제를 돌렸다. 백현의 유연한 진행능력에 아쉬워하던 관객은 다른 이야기로 관심을 돌렸고, 환호하고, 호응했다. 그리고 종인은 관객석 맨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는 승민을 발견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나왔을 땐, 백현이 서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맞닥뜨려서 다시 문을 닫는다던가 피해가는 것도 우스웠다. 꾸역꾸역 나와 섰다. 백현은 문 바로 옆의 벽에 기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공연을 하면서 열이 올랐을 테지만 반팔차림은 너무한 날씨였다. 승민은 조금 떨어져있는 유료주차장에 대어두었던 차를 가지러 갔다. 아마 조금 더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종인은 공연이 끝나고 승민이 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서있었다. 백현이 흘깃 넘겨다보곤 담배를 마저 태운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조금 전 무대 뒤에서 백현과 승민은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심지어 몇 마디 사회성 있는 사회인으로서 몇 마디 의례적인 대화를 나눈 것도 같았다. 외려 종인은 지켜보는 게 불편해 얼마쯤 떨어져있었다. 종인이 친한 형이에요, 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승민에게 서글서글한 얼굴로 악수를 받던 백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종인은 모른다. 확실한 건, 승민에게 백현은 민석과 찬열과 같이 좋은 인상으로 남을 거란 사실이다.

 

"대기업 다닌다며. 니 남친."

"......."

"잘됐네."

"......."

"어쨌든, 나는 평생 못 줬을 거니까."

 

종인은 갑자기 왈칵 화가 났다. 그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변백현이 축하해줄 이유는 없었다. 안정감 같은 거, 있으면 좋겠지만 딱히 절실해본 적도 없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바라던 덕목도 아니었다.

 

"종인아!"

 

뭐라고 한마디 짜증을 부리려는 찰나 뒤에서 승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어느 새 차를 앞까지 가져온 모양이었다. 백현이 무심히 넘겨다 본다. 반쯤 태운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납작한 스니커즈로 비벼껐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곤 턱짓을 한다.

 

". 부르잖아."

 

승민이 다시금 목례를 했지만 그대로 뒤돌아 클럽 안으로 사라진 백현이 그걸 받아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승민은 꽤 들떠있었다. 공연이 생각보다 더 재밌었던 건지, 종인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는 건지는 몰랐지만 내내 그 얘기를 했다.

 

"정말 다 잘생겼더라, 종인이네 밴드 사람들."

"그래요?"

"물론 종인이가 제일 멋졌어. 모델처럼 잘생긴 베이시스트였나?"

"......."

 

아마 승민이 진짜 자신을 설명하던 말이 뭐였는지 알게 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 보컬 분, 변백현씨, 되게 유쾌하더라. 말도 잘하고. 재밌는 사람일 것 같아. 앞으로 종인이 밴드 사람들하고도 많이 친해지고 싶어."

"......."

 

근데 종인이는 왜 말을 많이 안 해? 종인이는 누구랑 제일 친해? 우리도 뒤풀이에 갈 걸 그랬나? 다음 공연은 언제야? 승민이 물었지만, 종인은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근데 종인아, 기분이 안 좋아? 오늘 정말 멋있었는데. 기분에 맞춰주지 못해 미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창밖이 온통 새카맸다. 건너 편 대교의 불빛만 짧게 반짝이며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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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를 하고 얼마 안 돼서였다. 같은 과의 선배인 민석과는 군대를 가기 전 꽤 친하게 지냈다. 제대도 했으니 얼른 보자는 연락에 3월이 시작되자마자 만났다. 형은 나 제대할 때까지 졸업도 안하구 뭐해요? 놀리듯 묻는 말에 제법 진지한 체 꺼낸 얘기가 같이 밴드를 하자는 이야기였다. 그 날 박찬열과 변백현을 처음으로 동시에 소개 받았다. 민석을 따라간 예대의 음악관 동에서 연습실 문을 열었을 때 두 사람이 있었다. 딱딱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기타를 들고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처음으로 알게 되는 사람이었지만, 실제로 친한 만큼이나 같이 있는 게 어울리는 분위기의 사람들이었다. 대체로 비슷하고, 중요하게 달랐다. 둘 다 사람을 대하는 데 벽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민석의 유난한 중재 없이도 금세 가까워질 수 있었다. 사람 사이의 거리 자체를 좁히는 건 쉬웠다. 하지만 종인의 주관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언뜻 보기엔 그저 죽이 잘 맞고, 장난기가 많은, 다른 사람에게도 열려있는 같은 또래의 남자들이었지만 찬열은 밝은 이면에 연약한 감성을 가진 반면 백현은 꽤 강한 데가 있었다. 때로 마주치면 절대 먼저 놓아주지 않는 집요한 시선에 의미가 담겼고, 무심한 듯 다정한 성격에는 상대방이 무심코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어느 새엔가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민석만큼은 아니어도 주저 없이 둘을 이라고 부를 만큼 섞여들었지만 종인은 백현에겐 여전히 긴장감을 느꼈다. 솔직히, 두근거렸다. 오가는 의미 없는 대화들 가운데 백현에게 애인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을 만큼.

 

초반에는 연습도 연습이었지만, 단합을 다진답시고 술을 푸는 날이 태반이었다. 연습이 반이고 술이 반이었다. 같은 멤버는 아니었지만 언저리에서 비슷한 꿈들을 꾸는 또래들이 모여 자리가 커지는 게 보통이었다. 몇 잔 연거푸 받아마셨더니 뺨이 빨갛게 익었다. 열오른 얼굴을 식힐 겸 비척비척 가게 밖으로 나오자 먼저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던 백현이 돌아봤다. 옆에 가서 뻘줌하게 서자 백현이 담배를 반대편 손으로 옮겨쥐었다. 백현은 스킨십이 잦았다. 종인의 익은 뺨을 빈 손등으로 툭 아프지 않게 건들었다.

 

"취했어?"

"아니요. 그냥 좀 더워서."

"애들은."

"술기운 좀 오른 거 같긴 한데, 멀쩡해요. 아직 한참은 더 할 거 같은데."

"그래?"

 

니가 담배를 피우면 좋을 텐데. 영 신경 쓰이네. 말하며 담배를 비벼 껐다. 괜찮은데. 하고 말을 흐리자 신경 쓰이는 건 내 맘. 하며 씨익 웃었다.

 

"한 잔 더 하자. 나와."

"... 그럼 다들 지금 나오라고 말할 게요."

"아니, 너만 나오라고."

 

그 말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종인은 그 기분을, 그 이후에도 꽤 오래도록 기억했다. 술도 깰 겸 걷자. 앞장 서서 걷던 백현은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여덟개쯤 샀다. 몇 개 안 되는 마른 안주와 빈 맥주 캔이 바닥을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그리고 그제야 뜨끈하게 난방이 돌기 시작하는 자취방에서, 백현이 바닥을 짚으며 키스해왔을 때, 종인은 제가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

 

말이 합숙연습이지, 본질은 시마이가 없는 술판이었다. 집에 돌아갈 걱정 없는 술자리. 정해진 건 없었지만 하다보면 몇 달에 한 번은 이런 자리가 있곤 했다. '엠티'. 비슷한 나이 또래의 어울리던 밴드들이 너댓개 모이면 벌써 스무명은 되었다. 대부분이 남자였지만 개중 몇몇은 여성 멤버가 있기도 해서 여럿이 모여 먹을수록 재미가 없을 리 없었다. 점심 때쯤 하나둘씩 도착해 장을 본다고 몇 시간, 저녁을 먹는다고 몇 시간, 잠깐 모여 연습인지 정보 공유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곧 술판이었다.

 

종인은 원래도 술이 아주 센 편은 아니었다. 두어 잔만 마셔도 금방 얼굴에 열꽃이 펴 사람들이 취한 걸로 보곤 했지만 또 그 정도로 약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유독 빨리 술기운이 오르는 날이 있었다. 몇 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몽롱하고 졸음이 몰려왔다.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있던 자세가 반쯤은 무너졌다. 옆에 앉아있던 이웃 밴드의 드러머에게 잔뜩 치대어진다. 둘러앉은 원의 맞은 편 즈음에 있던 백현이 말을 꺼냈다. 지나치게 시끄러워서 당연히 많은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다. 옆에서 제 잔에 소주를 채우던 찬열이 아는 척을 했다. 뭐라고?

 

"잠이 부족해서 그래."

"?"

"종인이."

"...."

"쟤 좀 가서 재워라."

 

그 때 마침 온몸에 힘을 하나도 안 준 종인이 주륵 미끄러졌고, 아주 드러눕는다. 근처에 앉아있던 한 녀석이 목청을 높였다.

 

", 김종인 담당 어디 갔어? 변백현! 백현이형!"

 

백현은 한숨을 쉬었다. 찬열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묻는다.

"내가 할까?"

"...됐다. 내가 갈게."

 

백현은 손을 내저었다. 술이나 더 마셔. 찬열은 찝찝한 기색이었지만 그 새 손에 쥔 소주잔을 홀랑 꺾어 마셨다. 김종인 담당 아닌지가 언제인데, 식구가 다른 녀석들은 아직도 업데이트가 다 되려면 한참이었다.

 

 

 

몸에 힘을 하나도 주지 않고 들어 올린대로 끌려오는 종인은 물 먹은 솜이 따로 없었다. 잠자는 방 또는 짐방으로 끌고 와 대강 이불을 펴고 눕히자 꾸물꾸물 대며 덮은 이불을 돌돌 만다. 한동안 이쪽저쪽 몸을 움직이다 옆으로 누운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쪼그려 앉았던 다리를 펴고 일어나려는 차에 종인이 실눈을 뜬다.

 

"."

"...."

"아픈데, ."

 

마른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백현은 나가려던 몸을 돌려 다시 무릎을 접었다.

 

"어디가."

"그냥. 여기저기. ."

 

목소리에 어리광이 섞였다. 백현이 빤히 내려다본다. 빨리 자. 정말로 목구멍이 꺼끌하고 온 몸이 뜨거운데, 걱정하는 말 한 마디 해주지도 않고. 종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요즘의 건조한 변백현을 생각하면, 그냥 가버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새벽 눈을 떴을 때, 사위가 온통 어두웠다. 희미하게 빛이 새어들었다. 그 빛이 오는 곳이 가로등인지 달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리고 백현이 제 앞에 팔짱을 낀 채 모로 누워 잠들어있다. 바닥에 한 쪽 어깨를 지탱하고 몸을 구겨 넣듯 누운 자세가 불편한지 이따금 미간이 움찔댔다. 숨이 닿을 것 같아. 울음이 나올까 꾹 소리를 눌러 담았다. 매정하게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설움이 떠난 자리에도, 왜 아직 눈물은 남아있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종인은 생각했다. 언제까지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알던 남자였는데. 우리처럼 변명 한 번, 안 된다는 말 한 번 없이 헤어지고, 끝이 이렇게 별로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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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안 쿨한 거죠 연애가.

구차할수록 좋더라. 자기 생각보다 많이 사랑했으니 그런 거겠죠. 그렇게 낭만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下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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