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미 소프틀리

 

매리엇

 

 

0

자연스레 눈이 뜨일 때 일어났다. 해는 중천에 뜬 지 오래였다. 빛이 들어 깬 것도 아니었다. 눈이 부신대로 나름의 피할 방법을 찾으며 이리저리 얼굴을 숨기다 옹송그려 잤다. 당연하게도 침대 옆은 비어있었다. 오랜만에 안쪽에 사정하는 걸 허락했더니 다리 사이가 엉망이었다. 허벅지를 사각거리며 스치는 이불의 감촉이 좋았다. 충분히 미적거린 끝에 맨 발을 바닥에 내딛고 흘끔 보자 허벅지와 종아리 안쪽에 정액이 희게 굳어 일어났다. 어제 세훈이 씻으려냐고 물었지만 말았다. 졸음이 몰려와서였다. 종인은 섹스가 끝나면 그 나른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이 깨기 전에 그대로 잠드는 걸 좋아했다. 이럴 줄 알고도 그냥 뒀던 거긴 하지만 말라붙은 걸 보고서도 별 생각은 안 들었다. 이제 곧 씻으면 그만이다. 위생관념이 없는 편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민감한 편도 아니다. 그냥 가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많은 것에 한껏 너그러워져도 될 것만 같은.

종인이 가진 직업이란 게 그랬다. 그나마 요즘은 공연이 있는 시기라 오후에 느지막이라도 나가봐야했다. 제 아무리 국내에서는 단연 최고라 평가 받는 무용수라고 해도 아직 한국의 무대는 작았다. 클래식 발레 시장 자체가 작고 매니아 위주로만 돌아가는 상황에서 무대 자체가 넘치지 않을뿐더러 남자 무용수에게 돌아올 배역은 더 귀했다. 그나마도 발레리노가 필요한 국내무대에 있어선 나름대로의 브랜드를 가진 종인이 독점하는 형편에도 그러니 말 다했다. 가끔 국제무대에 설 기회도 더러 있었지만 대체론 일정이 뜨문뜨문했고, 일이 넘치거나 아주 없는 것도 대중없었다. 그러다보면 조급해지는 게 맞을 법도 했다. 종인은 이상하게 외려 여유로운 패턴에 맞춰 더 느긋해졌다. 좀 더 연습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날엔 새벽 4시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춤을 춰도 누구도 나무라지 않는 삶. 때로 게으름 부리고 싶을 땐 이런 저런 핑계로 점심시간이 다 지나도록 침대에서 나오지 않아도 조급증이 나질 않았다. 제가 움직이고, 제 춤을 추는 삶이었다. 종인에겐 일정하고 규칙적인 삶을 영위해야만 사는 사람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오히려 시즌인 지금이 바쁜 탓에 연습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두 시에는 나가야했다. 종인은 벽에 걸린 단순한 디자인의 검정색 시계를 힐긋 보곤 제 몫의 커피가 든 머그를 쥐었다. 살아온 환경 탓이 크겠지만 세훈 역시 당연하게도 살림에 야무지거나 똑 부러지는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제 앞가림에 충실하고 나름대로의 자기관리가 되는 타입이었다. 숫제 따라다니며 누군가 챙겨줘야 하는 류는 아니다. 스케줄이 비정기적인 종인에 비해 늘 먼저 일어나야 하는 세훈이 외출한 자리는 항상 깔끔했다. 제 아침을 준비하며 한 잔 남겨놓고 간 모닝커피를 덤으로 얻어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른하다. 종인은 이미 식은 머그를 들고 아일랜드식 식탁에 기대 홀짝대며 한 쪽 발등으로 제 종아리를 살살 긁었다.

삐리릭-

문이 열리는 소리에 종인은 반사적으로 현관 쪽을 돌아봤다. 세훈일까. 하지만 그 역시 아침 아홉 시면 칼같이 출근해야만 할 만큼 여유를 빼앗긴 삶을 사는 형편은 아니고, 그래봐야 한 한 시간 쯤 전에나 나갔을 터였다. 벌써 돌아올 일은 없었다. 지난 몇 개월간 거의 세훈의 공간에 제 집인 양 거리낌 없이 드나드는 동안 딱히 타인의 방문은 없었다. 종인은 짧은 순간 어쩌지도 못하고 머그를 쥔 채 속수무책으로 생각했다. 모르는 누군가를 맞이하기엔 자신의 목덜미며 가슴에 키스마크의 존재감이 지나치다는 사실을.

“어?”
“.......”

어색한 표정으로 한쪽 눈가를 구기는 남자는, 언젠가 세훈의 사진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당황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다. 상대방의 얼굴에도 그런 기색이 역력한 걸 보는 건 더 민망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기대하지 못 했던 남자를 맞이하고, 전날 밤의 흔적이 적나라한 무방비한 모습이라면. 더구나 상대는 완벽하게 차려입은 채였다. 붉은 기가 없는 짙은 회색 정장에 연한 페이즐리 무늬가 들어간 타이를 매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한 채 침묵이 감돌았다.

아..., 미안해요. 그는 일단 사과했다. 부드럽고, 보통보다 약간은 허스키한 목소리. 목소리에 질감이 느껴졌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고, 종인은 그가 다시 문고리를 잡고 뒤돌아 서있는 동안 잽싸게 가까이 있는 옷을 끌어다 꿰어 입었다. 혼란스러웠다. 솔직히 그 짧은 틈에 여유를 보일만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겸연쩍었던지 멋쩍게 웃던 그 얼굴. 한쪽 입매가 묘하게 말리는 웃는 표정이 이상할 만큼 뇌리에 남았다. 여유롭고 선선한 태도. 그렇게 많이는 못 봤어요. 제 어색함 때문인지, 종인을 위해서인지 가볍게 농담도 던졌다. 곤란한 듯 눈썹을 긁던 손가락. 지나치게 대담하거나 적극적이지도 않고, 그렇지만 매끄러웠다. 그런 게 선천적이라고 느껴졌다. 종인에겐 그 남자의 매너가, 그 미소가, 충격적일만큼 그런 감상이었다. 스스로가 당황스러울 만큼.

“다..., 입었어요.”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목소리가 아직 잠겨있었다. 큼큼, 몇 번 가다듬고는 괜히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단순히 벗은 몸을 들킨 것이 창피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여운이라면 지나치게 길었다. 그런 거라면 민망함을 덜어주려던 이 남자의 노력이 무색할 거였다. 솔직히 외모라면 세훈 쪽이 화려하다. 어딜 가나 눈에 띄었고, 굳이 재벌3세가 아니었더라도 주목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말갛고 갸름한 얼굴을 한 눈앞의 남자는 이 공간에 두어 개쯤 놓인 세훈의 액자 속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세훈의 이종사촌이었다. 변백현. 딱히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러고 보면 뉴스나 수준 낮은 오락 프로그램에서 몇 번 본적이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또렷한 인상은 아니었다. 매스컴에 잊을만하면 오르는 일가의 면면을 떠올려보면 대체로 오목조목하고 조화로운 이목구비에 인상을 남기는 것은 태생적인 오만함이 주는 아우라였다. 이질적인 건 도리어 세훈 쪽이다. 누구에게나 눈에 띌 법한 세훈의 선명한 화려함은 그의 아버지가 남긴 것이다. 이 집안사람들 정말 못 가진 게 없구나. 세훈이 그렇듯이. 공통점은 그 정도였고, 단순히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하지만 그를 처음으로 온전히 마주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란.

“세훈이... 친구?”
“...애인인데요.”
“아... 미안해요. 당황했겠네. 근데 나도 너무 놀라서...”

굳이 애인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애인이라고 잘라서 하는 말에 얼핏 얼굴에 스치던 난감함을 읽으며 더 확실해졌다. 즉흥적인 반응이었다. 남자의 흠이 되기가 더 쉬운 남자와 잘 수 있는 남자란 사실을. 왜 굳이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아무튼... 나는 변백현이에요.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비밀번호 누르고 합법적으로 열었으니 알겠지만, 걔 사촌이고. 이름이 뭐에요?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말의 나열을 들으며 김종인이라고 대답하자 그가 아는 척을 했다. 아, 혹시 국립발레단에...? 하고는 종인을 돌아봤고, 금세 수긍했다. 맞네. 그 김종인씨구나. 그리고 어쩐지, 세훈이가 갑자기 무슨 발레를 보러 다닌다길래. 라는 말도 덧붙였다.

“근데,”
“.......”
“초밥 사왔는데.”

그가 펴놓은 식탁에 마주 앉자, 반으로 가른 나무젓가락을 건넸다. 재킷을 입은 채로 접어올린 소매에 깨끗한 커프스가 드러났다. B. H. Baek. 기울인 이탤릭체로 수놓인 이름이 뒤집혀 있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출근 안했으면 가는 길에 내려놓으려고 했는데. 하며 기다란 젓가락을 쥐는 손가락의 모양이 그림 같다.

“계속 이렇게 일찍 나갔어요?”
“네.”
“우와.”

감탄사를 하는 투가 담백하다.

“요즘 출근 꼬박꼬박한다더니- 진짜네.”

그는 세훈이 대견해 못 견디겠는 표정이었다. 꽤 가깝다고는, 꽤나 특별히 돈독한 사촌지간이란 건 대강 알았지만 세훈에게 남자 애인이 있다는 것도 태연하게 넘길 정도였나. 백현이 낯을 가리는 류의 사람이 아니란 건, 세훈과도 꽤나 다르다는 것도 이 정도면 한눈에 알 수 있었지만 저를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흔연스러웠다. 유명한 집인데, 하고 그가 말했지만 맛을 잘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남자가 거기에, 애매하게 웃는 얼굴로 서있던 순간. 그 이후로 마치, 그가 열고 들어온 새로운 공간에 서있는 듯 했다.

 

 

 

1

벌써 몇 달이 된 일이다. ‘혼자 왔죠.’ 그렇게 묻던 세훈의 말투는 어딘가 부루퉁했다. 작업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단정적이고 조금의 느끼함도 담지 않은 말투였다. 종인은 바에 상체를 잔뜩 기울이고 앉아 손에 든 걸 홀짝대다 흘금 곁눈질 해 봤다. 피부가 페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하얬다. 거기에 차고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가 별로 멋없는 표정을 하고 거기에 서있었다. ‘그 다음 잔 살게요, 내가.’ 분명히 작업이 맞았는데, 종인은 아리송했다. 다음 잔은 됐다고 말하면 어쩌려고 저렇게 마치 선언이나 통보와 같은 말투를 쓰지. 뭔가, ‘혼자 왔나 봐요.’라던가, ‘위스키 좋아해요?’라고 묻는 게 더 좋지 않았나. 딱히 권위적이라든가 그런 인상은 아니었다. 다만 섹스를 하자고 꼬시는 남자치곤 좀 어설프다고 생각했다. 초짜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순진하기엔 너무 미남이었고, 종인도 그래서 퉁명스러운 미남이 사는 두 번째 잔을 마셨다. 그게 정말로 제게 첫 눈에 반했기 때문이라는 건 세 번 정도 자고 난 후에 알았다.

솔직히, 얼굴이 반반해서 따라 나선 것 치곤 세훈은 지나치게 횡재였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봐야 무슨 연예인이던가 아니던가 하는 정도의 어림짐작이었다. 첫날은 도저히 단서를 못 찾은 채 키스를 하고 옷을 벗었다. 그리고 생각 속에서 금세 사라졌다. 결국엔 TV에서 본 것은 맞았다. 다만 그는 연예인이 아니라 재벌가의 일원이었고,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존재로 몇 번 세간에 오르내리곤 했던 사람이란 걸 어떤 순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국내에서 전방위적으로 거의 모든 사업에 손을 뻗치고 있는 현선그룹 계열사의 젊은 상무. 일개 개인의 부에 비하랴만은, 실상 세훈의 입지나 지위 자체가 거대한 현선그룹이라는 전신 안에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려한 외모를 가진 로열패밀리의 일원으로 그의 사촌형제 등과 함께 셀러브리티로 매스컴의 이목을 끌어온 측면이 컸다. 그걸 깨닫고 나자 처음 그 바에서 못 알아봤던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들의 화려한 삶과 가족사 같은 것이 제멋대로 확대되고 재생산되어 시답잖은 연예방송이나 증권가 찌라시에 떠돌던 것을 상기하니 더 그랬다.

그런 남자가 저를 좋아한다니. 오세훈은 대한민국 바닥의 여자 중 못해도 절반 이상은 저들의 허무맹랑한 신데렐라 이야기에 끼워 넣고 싶을 만한 남자였다. 때로는 환상에 의해 덧입혀지기도 하고, 한 달에 두어 번은 여자를 갈아치울 것이라고 근거 없이 매도되기도 하는. 그런 남자였다. 하지만 세훈은 제 앞에 서면 때로 여직 고등학생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서늘해 보이는 피부를 가지고 제 위에 올라탈 때면 제 열을 주체 못했다. 종인은 여전히 조금 낯설었다. 항상 연애란, 더구나 한 사람이 먼저 시작한 연애감정이란 두 사람의 보폭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다른 사람의 연애도 다 그렇겠지만 종인의 연애도 그랬다. 종인은 때로 세훈이 드러내는 열정이 너무 성급하고 앞뒤를 재지 않아서 조금 뒤로 물러서곤 했다. 물론, 그게 더 세훈을 안달 내게 한다는 것도 모르진 않았다. 때론 솔직히 부담스러운 감정이었다. 완전히 같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오로지 싫지만은 않은 중압감이었다. 종인도 사랑하거나 조금은 좋아했던, 최소한 몸을 달게 했던 남자를 세훈 이전에도 여럿 거쳐 왔지만 동료 무용수들이나 감독에게 숨기지 않을 만큼 번듯하고 좋은 애인은 세훈이 처음이었다. 공연이 끝나면 한손에 꽃다발을 들고 서있는 남자가 싫지 않았다. 숨길 생각도 딱히 들지 않았다. 어디에 내놔도 평균보다 이상으로 멋졌고, 어느 새 벌써 친구처럼 익숙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매 공연마다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는 유명인사를, 딱히 무어라 소개하지 않아도 종인의 동료나 지인들 간에는 공공연한 친구 이상이었다. 다만 종인은 세훈과 네 달 정도 만났고, 아마도 서른 번 안팎으로 섹스를 했고, 지내온 숫자만큼 그를 좋아할 뿐이다. 앞으로 그 숫자가 한결 같이 커진다면, 적어도 그만큼은 더 좋아하게 될 자신이 있었다. 어떤 돌풍과 같은 사랑이나 충동적인 감정이 자신을 망쳐놓을 거라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종인이는 완벽해. 표정이나, 연기까지도 다. 그런데 이상하지. 왜 그런지 모르겠어. 분명 흠 잡을 데가 없는 데도, 감정과잉이 없어서 아쉽다는 건 무슨 느낌일까?’ 감독이 그렇게 말해도, 자신의 천재성에 화룡점정을 장식할 그 마지막 무언가가 결여됐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비평가나 대중이 인정하는 제 예술성이 빛바래지는 종류의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 없었으니까. 제 자신의 기대나 잣대도 그리 낮지는 않았고, 그거면 충분했다. 어느 순간까지는 분명 그랬다.

“어, 두 장이네?”

세훈이 유리잔에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캔 콜라를 부으며 말했다. 그가 샤워 후 갈아입은 회색 맨투맨 티셔츠 위에 은근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알아챌 만한 로고가 새겨 있었다. 세훈은 조금 전 건네준 티켓이 든 봉투를 다른 한 손으로 열었다. 이제쯤은 세훈의 얼굴만으로도 공연 관계자들이 제 손님인 줄 알아서 생각할 터였지만 언제나 종인이 건네는 건 관객석 가장 앞줄의 VIP석 초대장이었다. 두 장은 애매하다. 종인도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건넬 선물용이라면 좀 더 여러 장인 편이 자연스러웠고, 그게 아니면 세훈을 위한 한 장의 티켓이 딱 적당하다.

“백현이형 한 번 데려갈까.”

세훈이 무심상하게 말하며 종인의 허리를 마른 손으로 쓸었다. 세훈은 잦은 키스라거나 간지럽고 유난스러운 스킨십보다는 허리를 당겨 안거나 어깨를 감싸 안는 것 같은 좀 더 친밀한 스킨십에 자연스러웠다. 자고로 외로움은 외로움과 어울리는 법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세훈을 만나면서 든 생각이었다. 원래도 갖고 있던 생각이었지만 세훈을 만나면서 윤곽을 드러냈다. 종인에겐 유난하거나 다른 사람을 소모되게 할 만큼 불안한 감수성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춤추게 한, 자신을 예술적인 존재로 태어나게 한 만큼의 갈망을 가졌다. 꼭 그만큼의 근원적인 외로움. 평범하고 나름대로 유복한 가정과 무탈한 성장기 따위로 가려질 순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세훈은, 불혹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춤을 추는 남자를 아버지로 가졌다.

어느 집이나 나름의 복잡한 가정사는 있었다. 다만 일부 가정의 그것은, 특별히 재벌의 그것은 흔히 좀 더 드라마틱할 뿐이다. 세훈이 상무로 있는 회사의 그룹 총수는 대한민국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더 적을 법한 사람이었다. 이미 한 역사의 대들보 중 하나의 역할을 다 하고 노년으로 접어든 사내의 가족사는 화려했고 그 밑에서 규율과 분방함을 입맛에 맞게 편식하고 자라난 2세들의 면면도 제각각이었다. 세훈은 노인의 자유분방한 셋째 딸이 노인의 핏대 선 반대를 무릅쓰고 뛰쳐나가 선택한 남자와 낳은 아들이었다. 남자는 자유롭고, 춤을 추는 사람이었고, 대단한 미남이었다. 세훈은 그의 외모를 빼다 박았다. 그와 백현은 이종사촌이었다. 백현은 세훈의 엄마의 큰 오빠가 낳은 자식이었다. 그는 정당성이 분명한 우아하고 현명한 여자를 선택했고, 그 드라마에 반전은 없었다. 회장은 믿음직하고 우직한 장남이 낳은 번듯하고 서글서글한 첫 손자를 가장 사랑했다. 가장 마지막에는 모든 걸 누리고 거느리게 해주고 싶어 어쩔 줄을 몰랐다. 노년의 사내는 일구어놓은 게 많은 만큼이나 화가 많은 사람이었고, 눈 밖에 난 딸이 족보 모를 놈팽이와 낳아온 자식 같은 건 천덕꾸러기가 될 형편이었다. 계열사의 상무이사 자리. 나이가 어려 상무였지만 결국엔 세훈의 몫으로 돌아가게 될 자리였고 그건 결코 작지 않다. 세훈은 그걸 보전할 수 있게 해준 사람들이 백현의 부모라고 믿었다. 세훈에겐 큰외삼촌, 큰외숙모인 백현의 부모는 가진 만큼이나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분별을 잃은 노인의 화로부터 세훈을 지켜낼 힘이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고, 다행히도 백현의 부친에게 세훈의 엄마는 가장 사랑하던 여동생이었다. 그 영향인지 백현 역시 세훈에 대한 애정이 컸다. 세훈의 일상적인 말이나 생활에서 그 흔적을 더러 찾을 수 있었다. 백현에게 여동생이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세훈은 그가 남자형제에게 쏟아부어주고 싶었던 애착을 받을 대상이었다. 자신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자라게 해주고 싶었던 백현의 욕심을, 세훈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집에 아까 왔었다며. 너 만났다던데.”
“어... 아까. 너랑 점심 먹으려고 왔었대.”
“초밥 먹었어? 쩔지. 거기 초밥 대박인데. 변백현이 졸라 놀리더라. 웬일로 일찍 출근해서 그것도 못 먹었냐고.”

아무 것도 입지 않고 마주쳤던 오후의 해프닝을 말했을까 싶었는데 세훈은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다. 하긴, 굳이 그런 말까지 전달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세훈은 그 전에도 몇 번이나 백현이형이-, 변백현이- 로 시작되는 말을 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인상적으로 남았던 적은 없었다. 무심코 제3의 인물로 듣고 넘기기엔 이미 너무 구체적인 실체가 되어버린 존재였다. 초밥의 맛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기 싫어 종인은 잠자코 있었다.

“아, 사귄다고 말했어.”
“진짜?”
“어. 대충 아는 거 같던데. 뭐 이미 만났는데 숨길 필요도 없고, 말 나온 김에. 어차피 언제 소개하려고 했었고.”

종인은 조금 아연실색했다. 물론 애인이라고, 무책임하게 말해버린 건 자신이었지만 세훈의 아무렇지 않은 기색도 당황스러웠다. 세훈이 그런 말을 쉽게 털어놓은 것이 그들의 관계성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일면 직설적이고 대담한 구석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종인은 세훈이 약간의 사정이 있다고 해서 위축되기엔 보통보다 너무 넘치게 가진 게 많다고 생각해왔다. 세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양면성을 가진 남자다. 뚜껑이 시원스럽게 열리는 노란 스포츠카를 좋아할 것처럼 트렌디하게 생겨선 의외로 클래식한 검은 세단을 타는 것부터. 제법 익숙해진 지금은 곧잘 조잘대고 고등학생 여자애처럼 수다스러워질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말주변이 영 별로였다. 솔직히 수완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처음 섹스에서, 몸매가 끝내준다며 더티토크를 하는 것보단 열에 들뜬 눈으로 전신을 훑으며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하던 게 다였다.

“근데 그런 말 해도 돼? 남자...인 거.”
“아, 그 형 알아. 나 남자 만나는 거. 그리고,”
“.......”
“남자 돼. 형도.”

남자든 여자든 된다는 건 사실 공평한 명제는 아니었다. 자신은 근본적으로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이성과도 섹스할 수 있다, 라는 것에 더 가까울 때가 많았으니까. 그라면, 몸매가 예쁘다고, 피부가 매끄러워 더 흥분이 된다고. 백현에게서 제가 본 건 말갛고 단정한 얼굴뿐이었지만, 어느 때는 못 견디게 야비하고 세상 가장 저속한 얼굴로 야한 말도 할까. 그는 그런 말을 잘 할까. 어떤 키스를, 어떤 섹스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세훈은 어쨌든, 이라고 운을 뗐다.

“어쨌든, 변백현이 가장 사랑한 애인은 남자였으니까.”

세훈이 영원히 몰랐으면 했다. 그 말에 가슴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한 이유를.

 

 

 

2


세훈은 정말로 백현을 데리고 왔다. 주황색 할로겐 조명이 내리쬐는 무대와 가장 가까운 좌석에서 세훈의 옆에 나란히 앉은 그를 봤을 때 종인은 잠시 숨이 막혔다. 이미 예상한 전개였음에도. 맨 앞줄에 앉은 세훈은 늘 그렇듯 긴 다리를 외로 꼬고 등을 기댄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 역시 한 쪽 다리를 꼰 채였다. 잘 닦인 뾰족한 구두코에 빛이 반사했다. 양 손을 팔 받침에 얹고 깍지를 낀 채 무대를 응시하는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눈에 담긴 표정이 보일 것 같아서 종인은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2막에서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했다. 다행히 그간 쌓여온 노련함으로 모면했고, 동료들이라면 몰라도 일반 관객들은 눈치 채지 못 했을 거였다.

“축하해요. 진짜 멋지더라.”

무대 뒤로 찾아온 백현은 활짝 웃었다. 첫 만남에서 그럴 여력이 없던 것에 비해 분명한 미소였다. 왔어? 아는 척 하는 눈짓에 옆에 선 세훈은 고개를 한 번 까딱했다. 백현은 품 안에 가득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샛노란 프리지어. 잔 꽃 하나 섞지 않은 커다란 꽃다발에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꽃다발이 제 품으로 옮겨오자 손을 내민다.

“제가 프리지어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솔직히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흘리는 말투 같은 거, 더구나 만나는 사람 앞에서 속 보이는 미련한 행동 같은 것, 하고 싶었던 적 없다. 일상적인 감사보다 조금 더, 받아치는 말 같은 거. 누군가는, 세훈은 알아챌 지도 모르고, 백현은 이미 알아버렸을 것만 같은 제 본능적인 처세를.

“그냥 내 취향인데, 원래 좋아해요?”

잘 됐네. 화장하니까 또 다른 느낌인데, 되게 잘 어울려요. 그렇게 말하는 백현의 눈매가 이지러졌다. 짙푸른 정장에 한 톤 낮은 셔츠를 갖춰 입은 그는 어느 새 거둔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였다. 그가 건넨 노란 프리지어 한 다발은 몇 송이인지 한 눈에 세어지지 않을 만큼은 풍성하고 사치스러웠다. 그가 입은 파란 옷. 결핍을 모르는 남자의 품격. 속이 울렁거렸다. 지나친 보색 대비에.

왜 그렇게 담백하게 악수를 하고, 그 손의 악력을 느끼기도 전에 놓으면서. 예의 바른 거리를 두고 점잖은 척 웃으면서. 왜 그렇게 내 입술을, 다리를 쳐다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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