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의 연애


매리엇




6

 

엠티는 솔직히 귀찮은 게 반, 와보고 싶은 게 반이었다. 바로 제 룸메이트가 동아리 회장이 아니었다면 안 왔을 딱 그 정도. 솔직히 귀찮음이 조금 더 컸다. 동기 엠티를 한 번 가봤는데, 거기서 거기일 것 같기도 했고 종인의 취향은 꼭 아니었다. 다행히도 축구 동아리라고 해서 남자들만 바글바글한 시커먼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매니저라는 게 있어서, 생각보다 여자가 많았다. 그게 백현이 회장을 맡은 이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지원자가 늘었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또 그걸 속없이 다 받은 것도 백현이었다. 와글와글 각자 떠드는 통에 오전 댓바람부터 잠도 못자고, 장도 이만큼 보고. 한 시도 입을 쉬지 않는 형들과 지나치게 활달한 누나들 사이에서 혼이 쏙 빠진 종인은 펜션에서 보내준 봉고차에 올라탈 쯤이 되자 불어터진 얼굴이 됐다. 졸려. 자고 싶어. 딱히 어리광 받아줄 사람이 없어서정확히는 제가 그만큼 익숙한 사람이 없어서티도 못 내고 꾸벅 졸다가 짐을 주섬주섬 들고 내리는데 차문 앞에 익숙한 얼굴이 서있다. 폴짝 뛰어내리려다 멈칫했다. 괜히 잠깐 얼굴이 화악 빨개졌다. 왜냐면 백현이 꼭 유치원버스에서 내리는 애기 받아주는 유치원선생님 같은 폼으로 서있어서. 읏쌰싱글벙글 웃고 있던 백현이 양손에서 짐을 덜어간다. 농구동아리랑, 야구동아리랑 같이 하는 거라서, 준비단인 백현은 조금 더 일찍 와있었다.

 

짐 드는 거 안 힘들었어?”

너무 무거워요. 그리구 왜케 우리 아침부터 모여요? 졸려….

 

저도 모르게 툴툴대는 말투가 술술 나왔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눈을 비비면 그가 그래쪄요? 하는 표정을 짓는다. 왜 어이구, 그랬어? 안하지. 아니 그러니까, 받아주는 사람 없으면 나도 안 하는데. 참을 줄 아는데. 이게 다,

 

쭝얼쭝얼 말을 하는데 입에 뭐가 쑥 들어온다.

 

뭐에요?”

까까.”

 

그러고는 씨익. 사방에서 변백현! 백현이형! 이 사람 저 사람 난리가 난 통에 대꾸할 새도 없이 어, ! 하고는 가버렸다. 얼떨결에 입안에 밀어 넣어진 걸 우물우물 씹었다. 초코맛 난다. 초코칩인가. 백현은 성격이 빨리빨리에다 몸도 재서 벌써 저어만큼 멀어져있었다. 맨날 붙어있었는데. 그럴 시간이 없네. 조금 아쉽다. 서운하다거나, 뭐 그렇단 건 아니고 그냥. 있다 없으니까? 항상 소원하다고 느끼기엔 너무 가까이 있어서, 충분히솔직히 지나칠 정도로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게 갑자기 새삼스러웠다. 그러니까, 변백현이 단지 제 룸메이트 형인 것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선배이기도, 친구이기도, 또 누군가에겐 남자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고, 축구도 한 판 뛰고, 농구도 한 게임하고, 고기까지 구워먹는 동안 하루 종일 백현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축구 뛸 때 잠깐 마주치긴 했지만 이 쪽 챙기랴 저 쪽 챙기랴 그가 너무 바빠서. 보는 사람마다 백현이형은? 하고 안부 삼아 묻긴 했지만 여기저기 적당히 잘 어울려서 놀았다. 그래도 그렇지. 코빼기도 안 보이고, 했는데 저기서 본다. 고기가 좀 들어가고, 술도 좀 들어가고 나자 불이 켜진 무대 위에 그가 있다. , 마이크를 톡톡 몇 번 두드리며 목을 가다듬고는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잠깐만, 집중 좀 해주세요하고 운을 띄운다. 낮아진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리자 저마다 떠들던 테이블들이 꽤 조용해졌다. 사회를 보려나 했는데, 사회를 맡은 사람야구부 총무은 따로 있고, 노래를 부른다. 변백현이.

 

.”

 

되게 멋 부리는 노래를 부를 줄 알았는데 담백한 노래를 골랐다. 성비는 얼추 맞았지만, 운동한답시고 하는 놈들이 득실한 이 분위기에서 저게 될까 싶었는데 꽤 집중력이 좋다.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다 어느 소절마다 눈을 살짝살짝 떴다. 슬쩍 웃는 얼굴에 주변에서 탄성이 쏟아진다.

 

못하는 게 뭐야. 진짜. 솔직히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노래를 부르는 건 처음 봤다. 축구한다고 했지, 노래를 잘 한다고는 안 했잖아. 저 망나니한테 저런 면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있어서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아닌 것 같다. 저를 본 게 맞았다. 찡긋, 하고 웃었으니까. 저 이지러지는 눈매는 제게 늘 습관처럼 귀여워, 라고 말할 때의 그 얼굴이다. 생각해보면 백현은 늘 저런 점이 있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제게 집중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내가 너에게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행동이나 눈빛. 지금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왠지 언젠가 진짜 중요한 사람이 생긴다면 잘해줄 것 같다. 하지만.

 

주변을 슬쩍 돌아보니 벌써 매니저 여자애들의 눈에 꽉 찬 하트가 떴다. 종인은 뜨악한 표정을 했다. , 중증인데. 아니나 다를까, 몇몇 누나들아마도 이런 패턴이 익숙한은 변백현 저거 또, 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게, 완전 이기적이다. 진지한 마음두 없다면서.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먹지도 못하는 감인데 그렇게 맛있어 보이면 어떡해요?

 

 

 

 

 

7

 

으악!”

 

한참 현재진행 중(?)에 들어온 게 아니라서 천만 다행이었다. , 하마터면 못 볼 꼴 볼 뻔했네.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진짜 하마터면 봐버릴 뻔 했다. 백현이 트렁크만 입은 채 누워있었다. 물론 상의탈의 정도야 이미 몇 번은 봤고, 별루 일부러 보고 싶진 않거든요? 그렇게 조심하라고 해도 훌렁훌렁 하는 통에 면역이 될 법도 했다. 그런데, 옆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똑같이 맨몸이고, 이불에 감싸여서 그렇지 드러난 다리가, 백현보다도 옷을 덜 입었다. 뭔가 간지러운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분명히 변백현이 위에 올라타 있었다. 제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였다.

 

완전비매너.”

 

캐리어를 방에 들이지도 않고 문간에 서서 대놓고 쏘았더니 백현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제가 갑자기 들어온 바람에 허둥지둥 일어난 그가 새집을 지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얗고 예쁘고, 좀 예민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백현이 아닌 다른 사람은 민망함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이블을 머리끝까지 신경질적으로 올리고 등을 돌렸다.

 

집에 내려간 거 아니었어?”

.”

말 하지. 짐 많은 거 알았으면 데리러 갔을 텐데.”

 

바리바리 들고 온 제 짐을 보며 축 늘어뜨리는 눈썹에 저도 모르게 투정할 뻔 했는데, 아니지. 아니 이게 아니고. 논점이 이게 아닌데 또 말릴 뻔 했다.

 

그거 아니잖아!”

 

 

왜 말 안 했냐면,”

 

백현은 잠깐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너랑 잘 지내고 싶으니까 그랬지.”

 

했다. 입을 삐죽거리며 어디 뭐라고 하나보자하고 팔짱을 끼고 있다 순하게 내리는 눈꼬리에 괜히 눈을 피했더니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이봐. 당장 어색해 하고.”

.”

속이려던 건 아냐. 미필적 고의라고 들어는 봤냐.”

 

미필적 고의 미필적 고의.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보다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 그럼 혹시설마 나한테 흑심! 그래서 귀엽다고 한 거야?!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몰랐는데 정말 웃기는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이런 상황이 되면 저도 모르게 가슴을 엑스자로 가리는 모양새가 되는 거였다. 그 꼴을 보고 기가 막힌 백현이 귀엽다는 듯 피식피식 웃는다. 그리곤 미처 움찔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서 밤송이 같은 동그란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우쭈쭈.

 

걱정 붙들어 매세요사람이 기본이란 게 있지. 아무나 손대는 거 아니거든.”

 

어이가 없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사람 헷갈리게 해놓고 이제 와서. , 아무나 안 건드린다니? 그럼 내가 아무나? 참나. 괜히 기분이 나쁜 것도 같은데, 꼭 저가 그럴 이윤 없고 이게 뭔가 싶은 거였다.

 

나름대로 그런 게 있거든요. 신사협정 같은 거.”

 

신사협정 같은 소리. 왠지 좀, 억울하다.

 

괜히 오해하게 하기 싫어서 그랬단다. 불편해질 거잖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했다. 아직은 거부감 갖는 사람이 많잖아, 그럴 수 있잖아. 조곤조곤한 투로 눈을 맞추며 설명하는 데는 대충 설득당하고 말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은 퉁퉁 불어 있었지만 그래도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닌데, 그래도. 라는 말을 이해했다.

 

아까 백현이 같이 있던 남자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뻤다. 피부가 투명할 정도로 하얗고 뽀얬다. 한 번 보면 잊히는 얼굴은 아니라서, 실은 종인도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그를 제 방에서, 그것도 변백현의 침대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김준면. 석사 1학년이다. 대학원생이라 사실 학부생하고는 별로 접점은 없었는데, 경영학원론 교수님이 못 왔을 때 오리엔테이션에서 한 번 봤다. 강단에 서있어서 그런지 별로 표정이 없었는데,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요목조목 설명을 해주는 게 귀에 쏙쏙 들어와서 맨 앞자리에서 열심히 들었다. 준면도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아까는 좀 심통이 잔뜩 난 얼굴이라서 의외였다. 여전히 말붙이기 어려운 대학원생 선배 느낌이긴 했는데, 오리엔테이션에서 봤던 것보다는 좀 새침한 느낌이었다.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된 게 여간 맘에 안 드는 게 아니었는지, 예쁜 얼굴 가득 짜증을 부렸다. 정직한 아몬드 모양으로 생긴 쌍꺼풀진 눈이 세모꼴이 돼서는 말없이 옷을 빠르게 챙겨 입더니 문을 열었다. 백현은 누구한테나 유들유들하고, 너그러운 편이긴 하지만. 뒤통수에 신경질이 가득한 그를 부단히 달래 데리고 나갔다. , 준면아, 김준면.

 

어쩐지, 만나는 사람 없다더니. 그게 남자라서 그런 거였을 줄이야. 근데 이상하게, 생각보다 편견이 생기지 않았다. 변백현이라서 그런가. 좀 시각적으로 충격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변백현이 변백현이 아닌 게 되진 않았다. 여전히 편하고, 좋고, 또 괜히 얄밉고. 그랬다.

 

 

 

 

 

8

 

오늘 백현은 동아리 연합회 회장단 회의가 있어서 공결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 늘 옆자리에 앉았는데 빈 옆자리가 허전하다. 성적이 나왔다. 중간 퀴즈 성적. 1등이었다. 결과지를 받아들자마자 입이 딱 벌어졌다. 우와.... 첨엔 기분이 좋아서 입이 벌어졌는데, 입이 합 다물렸다. 저번에 백현이 시험공부 노트를 빌려준 그 과목이다. 하필. 같이 있었으면 오히려 더 미안했으려나. 맘껏 신나하고 싶은데 괜히 찝찝하고 그랬다. 한동안 손끝을 깨물고 앉아 있다가 자진납세 하기로 했다. 회의 중일텐데, 핸드폰을 볼까.

 

                        ― , 저 고급회계 퀴즈 일등 했어요.

 

답장은 10분 뒤쯤 왔다. 1이 없어졌다 싶을 즘 바로 문장이 떴다.

 

아이고~ 그래쪄?

 

안심을 하게 하는 예상된 반응에 입술을 삐죽이게 된다.

 

장하다. 곰팅. 궁디팡팡.

 

 

마주치자마자 득달같이 물었다.

 

화 안 났어요?”

? 무슨 화가 나?”

 

백현은 진심으로 의문 어린 얼굴이었다. 그런데 종인도 속마음 찝찝한 거 숨기고 에둘러가긴 싫었다. 백현이 별로 신경쓰지 않을 타입인 건 알지만,

 

그냥형이 다 정리해주고 가르쳐준 걸로 한 건데내가 일등해서

 

하고 그제와서 말끝을 흐리니까 그가 피식 웃는다.

 

그래도 형아가 1등하는 데는 지장이 없거든요? 잘했어. 뭐 그런 걸 눈치를 보고 그러냐.”

 

맞다. 백현도 의외로 공부를 꽤 잘한다고 그랬는데. 사실 그래서 찝찝했다. 되게 자신감 넘치게 말하는데, 중간고사 따로 안 볼 거라서, 꽤 반영될 거라고 했는데. 진짜 괜찮나. 하면서 퉁퉁한 입술을 씹고 있자 뺨을 슬쩍 잡아당겨서 입술이 퉁하고 빠졌다.

 

글구 내가 언제 우리 곰팅이한테 화낸 적 있나예쁜 짓만 하는데.”

 

하고 웃는다. 예쁜 짓 한 건 저가 아니다. 백현이었다.

 

착해가지구. 나 진짜 신경 안 쓰는데? 그리고 게시판 좀 보고 다녀라 애기야.”

게시판 왜요.”

보면 알아.”

 

 

 

 

 

9

 

그리고 금방 이유를 알게 됐다.

 

<딘스 리스트>

 

201X1학기 경영대학 성적 우수.

수석 변 백 현

 

201X2학기 경영대학 성적 우수.

수석 변 백 현

 

평소에 남들이 뭐하고 어떻게 사는지 워낙 관심이 없어서 몰랐다. 들여다본 적도 없었고. 백현이 말해준 적도 없는데. 가방을 메고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습관적으로 그냥 지나쳤다가, ‘게시판 좀 보고 다녀라 애기야.’ 생각이 나서 쪼르륵 게시판 앞으로 가서 섰다. 거기에 눈을 반달로 접고 웃고 있는 변백현의 앳된 증명사진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모야. 1학년 때 사진인가.


―   봤어요.

 

짧게 보낸 세 음절에 연달아 답장이 왔다.

 

브이. 손가락 두 개가 펴진 이모티콘 하나를 덜렁 찍어 보냈다. 종인은 그걸 보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 실실 웃음이 번진다. 손가락으로 자판을 느리게 눌렀다.

 

거봐. 이제 안 미안하지?

형 지금 수업. 끝나고 카톡 할게?

 

이유를 잘 설명할 수가 없는데, 생각 이상으로 너무 다정한 말투에 조금 울컥해서 눈물이 날 뻔 했다.

 

 

 

 

 

10

 

처음으로 맞는 기말고사 기간이 왠지 긴장이 돼서, 열심히 준비하려고 했는데 딱 하나 못 이기겠는 건 잠이다. 같이 공부를 하자고 한 건 저였는데, 밥을 먹고 났더니 잠이 쏟아져서 고개를 꾸벅 몇 번을 떨궜더니 백현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형은 잠도 없나.... 좀 자. 깨워줄게. 하는 달콤한 유혹에 못 이긴 척 그럼 15분 후에 깨워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냉큼 엎드렸다. 그가 알았어, 알았어하는 걸 두 번이나 듣고 잤는데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눈이 스르르 떠졌는데 몽롱해서 엎드린 채로 눈을 빼꼼 들었더니 백현의 집중한 얼굴이 보인다. 조용히 눈을 뜨고 한참을 구경했다. 펜을 쥔 손. 사각거리는 샤프펜 소리. 이럴 땐 좀안 어울리게 멋있다. 그리고 딘스 리스트에도 붙어있다.

 

깼어?”

 

옆얼굴을 구경하던 저와 눈이 자연스레 마주치자 머리를 쓰다듬는다.

 

언제 스스로 일어나셨지, 이 잠탱이가. 해놓고는, 잘 잤어? 하고 웃는다. 말투가 녹을 것 같다. 녹을 것 같은 말투를 쓴다. 이상한 사람이다. 제게만 그런 게 아니란 걸 확인하면 괜히 서운하고 그 때부터 가슴이 꽉 막힌다. 변백현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형의 애인이 되고 싶은 건, 진짜 아니었는데.

 

준면의 전화를 받는 백현은, ‘, 준면아.’하고 말한다. 형이라고도 하고. 또 가끔은 준면아. 라고도 부른다. 그게 각별한 사이라는 뜻일까. 하지만 그렇게 그를 소모시키거나, 누군가 차지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굳이 알게 되지 않았다면, 계속 몰랐을 것도 같았다. 왜냐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잠이 덜 깨 비비적대고 있는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는 손에서 향긋한 비누냄새가 난다. 기분 좋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서 잠이 또 솔솔 올 것도 같다. 항상 궁금했다.

 

형은 근데 왜 담배냄새가 별로 안 나요?”

 

꼭 놀랄 일은 아니고, 해서 안 될 짓도 아닌데 종인은 처음 백현이 흡연자라는 걸 알게 됐을 땐 눈이 이만큼 커졌었다. 왜냐하면 한 번도 못 느껴서. 형 담배 폈었어요? 라는 물음에 멋쩍은 얼굴로 어어, 왜 나왔어? 했다. 그렇게나 지겹게 붙어있었는데 몰랐다는 게 더 어이없고 한편 사기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고. 그런데 또 일부러 속인 건 아니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근데 나 왜 몰랐지? 억울해 하며 물었더니 너 있는 데선 안 피니까. 니가 안 피잖아. 해서 그가 정말 저를 어리다고 생각하는구나 하고 또 느꼈다.

 

많이는 안 피니까.”

 

백현에게선 항상 청결한 냄새가 난다.





***

모르고 시작한 사랑에는 약도 없다는데. 큰일났네

애기곰 이제 어떡하지요~

과연 애기곰은 내꺼인지 남의꺼인지 티도 안나는 형을 쟁취할 수 있을까!

두구두구 애기곰의 캠퍼스 연애성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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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의 연애

 

매리엇

 

 

 

 

 

0

 

입학식은 낼모레인데 미리 불러다가 오리엔테이션씩이나 하고. 무슨 기숙사 배정 오티를 거창하게도 한다 싶긴 했다. 종인은 룸메이트 배정표를 받아들자마자 어이가 없었다. 하나, , 세엣, 네엣학번이 무려 다섯 개나 높다. 참나. 신입생을 복학생이랑 배정해주다니 이게 무슨 경우냐. 신데렐라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같은 과.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감의 말에 따르면 단기적이고 단편적인 인연에 그치지 않고 서로 상승하는 좋은 멘토링 관계가 되라는 취지로 배정이라는데. 고마워서 눈물 나겠네. 종인은 입을 내밀고 속으로 할 수 있는 욕은 다 해봤다.

 

이 많은 사람 중에. 같은 나이의 신입생 친구도 많았을 텐데. 대마왕의 심술이야. A4용지 몇 장에 걸친 배정표를 앞뒤로 휘적거리며 애꿎은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을 때 눈앞에 턱, 짚어지는 손에 깜짝 놀랐다. 손이 꽤 예쁘다는 걸 알기도 전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봤다. 안녕? 남자가 아주 해맑게도 웃는다. 씨익 올라가는 시원한 스마일라인.

 

잘 지내라잖아요 애기야.”

 

우웩. 소름이 돋았다. 급기야 초면에 애기야 라는 말도 안 되는 호칭으로 부르는 느끼하고 이상한 형이랑 어떻게 살지. 눈앞이 캄캄했다. 재수 없으면 변태일 지도 모르고!

 

그렇게 김종인의 캠퍼스 라이프는 처음부터 앞이 순탄치 않은 듯 했다.

 

 

 

 

 

1

 

다행히 순항인지 안 순항인지는 아직 몰라도, 적어도 신데렐라 버전은 아닌 듯 싶다. 왜냐면 나란히 입주한 종인의 룸메이트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침대 어느 쪽 쓸래? 하고 물었으니까. 종인은 잠시 정말 쏙 골라도 되나 한 번 겸양의 미덕을 발휘해야하나 고민하며 눈을 굴리다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 하는 남자의 선선한 얼굴에 냉큼 골랐다. 저 오른쪽 할래요.

 

종인의 룸메는 좋게 말해 친화력이 좋고 사실은 좀 너무 쓸데없이 친한 척을 해서 조금 부담스럽다. 저보다 키가 좀 작은데, 아무렇지 않게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처억, 어깨동무를 해서 종인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뭐야 이 형진짜 부담스러운 스타일이야. 더 나쁜 건, 조금 숨기지 못하고 어색해하는 티를 내도 전혀 개의치도 않는다는 거, 그래서 쭈뼛대는 건 오로지 종인의 몫이라는 거? 그 정도였다.

 

선배님이자 룸메이트의 이름은 변백현. 군필. 스물다섯. 경영대 12학번. 종인보다 학번이 꼭 다섯 개 높았다. 그리고 추가로 종인의 눈에는 복학생 오빠의 전형적인 매력(?)을 골고루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형이라고 불러. 완전 초초초면인데 대뜸 제 이름을 말해주고 그냥 형이라고 불러, 아저씨는 안 되고. 해서 종인은 그냥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았다. 약간 4분의 1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다행인 거라면 어쨌든 그의 붙임성 때문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서로 쳐다보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몇 개 없는 짐을 풀고 할 일 없이 앉아있다 같이 학교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갔다오기로 했다. 남자 둘이 사는데 어느 한 쪽이라도 살뜰하게 샴푸며 비누, 생필품 같은 걸 다 챙겨왔을 턱이 있나. 학교 앞 마트는 마트치곤 조그만 1층짜리라 뭐가 많진 않겠지만 그가 샴푸를 안 파는 마트가 어딨어~ 라고 말했기 때문에 따라가기로 했다.

 

종인은 매대를 따라 쭉 걸어가며 이것저것 집어들었다 내려놨다 했다. 한 두 걸음쯤 뒤에서 카트를 밀며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백현을 연신 돌아다보며 이거요? 이거? 저거? 하고 세 번은 물었다. 벌써 바디샤워를 고르고 치약을 고르고 이제 샴푸를 고르는 참인데 백현의 대답은 몇 번째 한결같다.

 

룸메님 원하는 걸로 하세요

 

이것두 오케이. 저것도 오케이. 진짜 별로 안 중요해보이고 아무거나 룸메님이 좋으면 그걸로 하시란다. 사실 종인도 사회생활은 해본 적 없지만, 맨날 집에서 귀염만 받고 자랐지만, 그래도 나름 처음 대학교 들어왔다고 사회 초년생처럼 카트도 제가 끌어야 하나 눈치를 살짝 볼 뻔 했는데, 백현의 행동이 뭐든 너무 빨랐다. 아무렇지 않게 바지주머니를 뒤져서 동전을 넣고, 카트를 꺼내고, 손잡이를 야무지게 잡고 안 들어가? 하고 고개를 왼쪽으로 까딱 하기에 그냥 어영부영 들어왔다. 지금은 그 손잡이 위에 팔을 얹어 상체로 어슬렁어슬렁 밀고 있다. 그러니까, 좀 생각보다,

 

아이 진짜! 형은 진짜 아무것도 관심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점이 있다. 종인은 원래 나름 친하다고 생각대면 잘 치대고 잘 삐대는 성격이지만, 편해지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데, 그러니까 낯을 제법 가리신다 이 말이다. 흥분해서 큰 소리도 내고 뗑깡까지 부리려면 좀 더 버퍼가 필요한 사람이고. 원래는 정말로 그랬는데, 만 하루도 안 돼 벌써 목소리를 높여버렸고. 빽 소리쳐 놓고 스스로도 조금 뜨끔했다. 근데 정작 백현은 종인이 저한테 목소리가 커진 것도 감흥 없는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다만 그렇게까지 말하니 들여다보는 시늉이라도 해준다는 정도다. 여전히 흥미 없는 투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너 좋은 걸로 골라. 난 진짜 상관없는데? 아니면 왜. 고르기 어려워서 그래? 줘봐. 그럼 난 이거.”

 

하고 금세 콕 찍는다. 정말 생각해본 게 맞을까. 의문 삼기도 전에 어? 너랑 좀 닮았다. 하고 웃었다. 양 손에 들린 샴푸 두 개 중 그가 집은 이거에 그려진 동글한 곰 캐릭터. 제가 어린이도 아니고 그렇게 귀여운 걸 닮았다고 하다니. 우와종인은 좀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마음에 금방 또 빽 했던 게 누그러지고 잘 생긴 어깨가 움츠러든다. 진짜 모야이 형

 

 

 

 

 

2

 

백현은 사람을 묘하게 말려들게 하는, 역시 처음 생각했던 대로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 뭔가 퉁을 놓아보려고 해도 유들유들하게 이 말 저 말 하는 통에 대꾸를 해주다보면 금세 쏙 그 페이스에 말려서 따라다니게 됐다. 썩 내키진 않지만 첫날부터 운명의 장난으로 이 느물거리는 그것도 무려 다섯 살이나 많은 복학생 형과 꽁꽁 짝지가 지어져버렸겠다 하는 수 없이 끌려 다녀 본 결과 몇 가지를 알게 됐다.

 

일단 좀 이상하긴 해도 생각보다 잘 해주고 못된 사람은 아닌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사람이다. 같은 경영대 같은 반의 선배이고, 이미 몇 년 전에는 과대였다고도. 그 때 아주경영대의 부흥기였지, 부흥기. 하고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넉살을 부리는데 종인은 우엑, 허세. 하고 질린다는 표정을 했지만 또 사실이 아닌 건 아니란다. 과 행사마다 그렇게 참여율이 좋았다고. 또 지금은 경영대 축구부 주장이고. 뭐야, 현역 뛸 때는 지나지 않았나. 미심쩍은 종인이 포지션 뭔데요? 하고 물었더니 나 레프트윙. 하고 대꾸한다. 골키퍼 아니에요? 저 고등학교 때 골키퍼 맨날 3학년 주장 형이 했는데. 그거 팀에서 제일 나이 많고 체력 딸리는 사람들이 뼁끼 치려고 그러는 거야. 형도 거기서 나이 제일 많잖아요. 하고 입을 내밀었더니 내가? 하고 전혀 모르겠다는 뻔뻔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제일 아니거든, 애기야. 하고는 또, , 너보다 많은 것뿐이지 나 아직 팔팔할 나이거든? 얘 진짜 큰 일 날 애네하고 요즘 애들 진짜 무섭다며 눈썹을 과장되게 축 늘어뜨리기도 했다. 엄살. 물론 종인은 들은 척도 안 했다. 하지만 그래도 좀 인정한다. 그쯤 되면 사기캐 아닌가 싶은데, 쪼끔 한심해 보여서 그나마 현실적으로 보인다는 거. 좀 한량 같아서 그 모든 잘난 점이 안 믿긴다는 점 빼고는 다 잘났다. 실제로 인기도 많은 것 같았다. 같이 다니면 인사도 많이 받고, 오빠 소리를 어디 복도 통과할 때마다 들은 것 같다. 원래 여자들이 장난 너무 많이 치는 사람 싫어한다구진중한 사람 좋아한다구언제 들은 거 같았는데 다 뻥이었나! 꽤 설득력 있는 정보원이 말해준 거였는데 약간 덕분에 세계관에 혼돈이 올 정도로. 아 그러니까, 내 누나나 여동생이라면 소개해주기 싫은 점 빼고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뭐야. 우리 룸메 형아 따라온 거야?”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늘 이상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아니거든요. 그냥 신청한 거예요.”

 

입학식이다 뭐다 해서 수업을 하는 둥 마는 둥 보낸 첫 주가 지나고 강의실에 들어가 보니 또 백현이 있다. 맨날 보는 얼굴을 여기서 또 본다. , 여기서 또 볼 것까진 없는데. 눈 코 입 분포까지 외우게 생겼어. 뚱한 얼굴로 두꺼운 책을 품에 안고 들어갔는데 모르는 체 하려고 해도 계단식 강의실 한 가운데 줄에 무리를 지어 있는 통에 그럴 수도 없다.

 

어쭈. 배짱 좋은데. 야 이거 고급회곈데 애기야.”

할 수 있어요.”

 

하고 고집스러운 표정을 짓자 잔뜩 귀여워하는 표정으로 웃어버린다. 웃겨. 애기 취급하는 것 같은데 종인도 다 알고 신청한 거란 말이다. 커리큘럼도 얼마나 꼼꼼히 다 읽어보고 얼마나 힘들게 일찍 일어나서 수강신청도 했는데. 나름 자신 있었다. 3학년 이상 권장 수업이라고 써있지만 나름 한 뚝심 하는 걸. 물론 백현도 그랬겠지만 저도 이 학교 들어오려고 열공한 만큼 은근 내공이 있다 이 말씀이다. 하고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었더니 백현이 푸스스 한다. 누구야? 백현의 무리 중 한 사람이 묻고 어깨가 당겨졌다.

 

내 룸메. 귀엽지.”

 

했더니 몇몇이 동조하며 응 귀엽다, 하고 답하기도 하고 누구는 잘생겼다고도 말해줬다. 종인은 백현이 이렇게 자기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마다 쑥스럽고 괜히 쭈뼛해진다. 귀엽지, 하고 말하는데 누가 안 귀여워.’라고 하겠어? 진짜 민망한데 백현은 매번 되게 귀엽지, 하고 말한다. 결국 좀 미덥진 않지만 백현을 따라가 자의반 타의반 엉겁결에 가입하게 된 축구동아리에서도 운동부 특유의 짓궂은 야유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리니까. 또 유난히 어려. 귀엽지 않냐?’ 뺨을 꼬집던 손에 얼굴에 열이 올라서 파닥파닥 쳐냈던 아주 불운한 기억이 있다. 백현보다도 한 뼘은 더 큰그리고 훨씬 아저씨 같은다른 선배들의 , 백현이 형 애기래. 룸메.’하던 소리도 생생하다. 우웩.

 

어디 가, 너 독강이지. 보나마나지. 이걸 1학년이 누가 듣냐. 하고 잡는 통에 결국 탈변백현 시도는 무산되고 언저리에 눌러앉았다. 수업 때 말 걸면 이씨, 말 걸지 말라니까. 하고 구박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백현은 수업이 시작되자 조용해졌다. 나름 필기도 전국구는 아니어도 좀 깨작깨작 하고 수업도 열심히 듣는다. 뜻밖의 면모에 필기를 하다말고 교수를 바라보는 옆얼굴을 훔쳐보고 있으려니 교수가 마무리 공지를 시작했다.

 

자아, 이번 학기는 시범적으로 태스크 포스 형태를 시도할 거야. 2주에 한 번 대학원 회계 수준의 굵직한 문제들을 배분할 거고, 팀끼리 풀이를 하세요. 팀 과제의 비중은 약 40프로가 될 거고. 각자 자발적으로 팀을 구성해서 나한테 다음 수업 시작 전에 제출하세요. 모여서 얘기들 해보시고 수업은 여기까지 합시다.”

 

회계 수업에서 팀플이라니. 원래 수업 안내에는 없던 얘기다. 종인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백현 말마따나 당연히 독강이고, 회계원리나 기초과목 같은 건 동기들과 우르르 모여 듣지만 이건 진짜 혼자인데. 그래도 상관없을 줄 알았다. 문제풀이가 위주고 시험으로 결정이 나는 과목이니까. 말했다시피 종인은 낯가림이 있는 성격이고, 꼭 그게 아니래도 다 삼삼오오 아는 사람인 것 같은 분위기에서 아무에게나 먼저 말을 걸어서 같이 팀을 하자고 하기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냥 좀 교수님이 알아서 정해주지. 멀뚱히 서서 눈치를 보고 있는데 누가 옆에서 팔을 휙 잡아당겼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는데, 손의 주인은 이제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백현이고.

 

얘도 같이 하자.”

 

어깨동무를 한 채로 멀뚱멀뚱 백현의 조원들을 보며 서있는데, 솔직히 뻘줌했지만 정말로 대안이 없었다. 딱히 좋다는 건 아니지만, 팀플을 못하는 것보다는 오지랖 대마왕이라두 변백현이 낫잖아. 백현은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 있고 대부분 수긍하는 분위기인데, 한 명이 탐탁찮은 얼굴로 말했다. 대학원 문제라잖아. 1학년은 좀 그런데.

 

종인이는 똑똑해서 괜찮아. 그치.”

 

백현이 물색없이 곧바로 받아쳐도 그는 영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깐깐하게도 생겼다. . 종인은 입을 대발 내밀었다 저를 훑어보며 안경을 한 번 고쳐쓰는 그와 눈이 마주치고선 곧 쑥 집어넣었다. 백현이 타이밍 좋게 덧붙였다.

 

. 정 안 되면 내가 업어 키울게. 됐지?”

 

니가 책임지는 거다, 라는 식의 마지막 뒤끝을 끝으로 그럭저럭 넘어갔다. 백현이 야, 내가 챙겨줘서 좋았지? 라던가 또 잘난 척을 하면 그 김에 묻어서 이건 좀 고맙긴 해요라고 말해보려고 했는데 백현이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아서 어물쩍 넘어가버렸다. 에이, 말해버렸어야 되는데. 또 이럴 땐 말을 안 해. 말하지 말랄 땐 엄청 장난치고. 이럴 땐 입 싹 다물고.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 뭐 먹을래. ○○치킨? . 그래도 이번 거는 좀, 꽤 고마웠다고 해야 되나.

 

 

 

 

 

 

3

 

, 근데 여자친구 없어요?”

 

백현이 사준 치킨을 우물대며 냠냠 먹어치우다 불쑥 물었다. 닭다리를 두 개나 먹고 난 뒤였다. 난 다리 잘 안 먹어. 피자파야. 애기 많이 드세요. 하길래 사양 않고 냉큼 두 번째도 쫄깃한 살이 올라붙은 다리를 집어들었다. 피자파라니까 괜찮겠지! 입에 욕심껏 밀어넣은 다리를 우물거리면서 치킨 한 조각을 더 집어들곤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형 여자친구 없어요?

 

, 없는데?”

 

입가에 양념을 묻힌 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백현이 대답은 건성으로 하면서 두루마리 휴지나 뜯어서 주는 통에 그제야 알았다. 건네받은 휴지로 입 주변을 벅벅 문댔다.

 

왜요? 인기 많잖아요. 이해는 안 되지만 그래두.”

 

하는 말에 백현이 푸하하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호탕하게 웃은 바람에 라운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쳐다볼 지경인데 눈물이 쏙 빠지도록 웃는다. 허리를 접고 눈까지 찡그리며 웃었다. 그렇게 웃긴가. 뚱한 얼굴로 치킨 한 입을 더 물자 간신히 웃음을 그친 백현이 말했다.

 

너 진짜 골 때린다. 그렇게 대놓고 솔직하기야?”

아니 뭐.”

나 진짜 상처받았어, 애기야.”

 

화살 맞은 이순신 장군처럼 가슴을 쥐고 오버액션을 또 하신다. 치킨도 사주고, 닭다리도 두 개 다 먹게 해주는 사람한테 너무 심했나, 라는 생각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글쎄. 꼭 누구랑 연애를 정해놓고 해야 하나?”

 

하고 대답하는 백현이 갑자기 진지해보여서 종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얼굴을 찬찬히 보니 아직까지 입가에 웃음기는 남아있지만 마냥 장난을 치는 건 아닌 거 같다.

 

형은 그럼 한 명만 진지하게 사귀어 본 적 있어요?”

진지하게? 잘 모르겠네. 한 명씩만 만나긴 했지.”

그럼 진지하게 만날 생각 없어요?”

지금은 딱히.”

 

아니란 대답을 당당하게도 한다. 아무리 인간이 입체적인 존재라지만 변백현은 해도 너무 하다. 정말 좋은 사람인지 나쁜 놈인지 시도 때도 없이 헷갈린다. 종인의 상식으론, 그래두 결혼을 꼭 하진 않더라도 언젠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 사랑하고 싶은 법이 아닌가!

 

그럼 결혼은 어떻게 해요?”

글쎄. ,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물론 종인도 대학에 오면 좀 더 다이내믹하고 문란한(?) 라이프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쪼오끔 기대는 했지만. 그래도 대체로는 이상적이고 그림 같은 사랑을 꿈꿨다. 대학생이 될 걸 생각할 때마다 그런 상상을 했다. 몽글몽글하고 예쁜 사랑을 하고 싶다는 그런 거. 같이 벚꽃이 만개한 캠퍼스도 걸어 다니고, 잔디에서 피크닉도 하고, 놀이공원도 가고, 도서관에서 같이 시험공부도 하고. 그런 거였다. 목표하는 대학 이름을 독서실 책상에 꽝꽝 붙여놓고 꾸벅꾸벅 졸면서 상상했던 캠퍼스 연애는 그런 거였다. 너무 착하고 뭘해도 예쁘고 뭐든지 같이 하고 싶은 여자친구가 너무 좋아서 같이 결혼도 하고 애기 몇 명 낳을까 상상도 하고 그런 거잖아. 너무너무 졸리고 그냥 자고 싶고 관둘까 싶을 때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버티게 하던 로망이었는데. 백현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거다.

 

결혼은 형이 이미 했으니까. 아 맞다, 나 조카 있는데. 볼래?”

…….”

예쁘지. 딸이야.”

 

팔불출처럼 휴대폰을 꺼내 아기 사진을 보여줬다. 얄밉게도 제 로망을 와장창 깨는 소릴 해버려서 미운 마음에 입이 이만큼 나왔었는데, 사진을 보자마자 그게 쏙 들어갔다. 와아. 완전 귀엽다. 종인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천사 같아요. 하얀 찹쌀떡 같이 피부도 고운 아기의 웃는 얼굴이 사랑스럽다. 촉 처진 눈매가 백현을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인정하긴 싫지만 백현은 좀 귀엽게 생겼다. 저렇게 얄미운 말만 하지만 얼굴은. 하지만 말은 안 해줄 생각이었다. 아기의 가지런한 속눈썹이 백현을 닮은 것 같다는 얘기도. 근데 이런 애기 보면 나중에 막 애기 낳구 싶지 않아요? 저는 낳고 싶은데. 일단 두 명이요. 딸도 예쁘구, 아들도 좋으니까. 하나만 있으면 아쉬우니까 두 명 낳구. 나중에 또 생기면 아들딸 상관없이 셋 낳아도 괜찮구.

 

어이구. 그래쪄요?”

뭐야, 또 애기 취급 하구.”

그런 거 아닌데. 근데 너는,”

 

눈이 마주치자,

 

넌 꼭 진짜 좋아하는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

 

턱을 괴고는 나머지 한 손을 뻗어 머리통을 푹 누른다. 그 때 백현은 좀 어른 같이 웃었다. 순간 조금 두근거렸다. 아씨, 두근? 이 아닌데. 번지수가 좀 잘못 됐는데. 종인은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잡귀야 물렀거라.

 

 

 

 

 

4

 

이게 뭐에요?”

 

책가방을 한 아름 끌어안고 졸기 직전이던 눈앞으로 쓱 들이밀어진 손에 그만 화다닥 잠이 다 깼다. 존 적 없는 것처럼 표정관리를 하며 슬쩍 보자 노트 정리다. 백현과 같이 듣는 수업의 쪽지시험이 바로 낼 모레였다.

 

요약정리. 책에 쓸데없는 거 많더라. 그것만 대강 훑고 들어가도 될 거 같은데. 너 뭐 다른 거랑 겹친다며.”

형 공부 꽤 한다던데.”

, 나름대로.”

 

그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한다.

 

믿어줄게요. 완전 의외긴 하지만.”

얼씨구. 은인도 몰라보고 말하는 것 좀 보게.”

 

너 아직 한 번도 다 안 봤지. 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하는데 조금 찔렸다. 축구도 같이 했고, 동아리 술모임도 같이 나갔고, 놀기도 같이 놀았는데 백현만 대체 언제 한 걸까. 이해가 안 돼. 그래도 내밀어진 노트는 마다 않고 꾸물꾸물 챙겼다. 생각했던 것보다 글씨가 옹기종기 귀엽다. 뭐든지 느물거리고 대충대충 편하게라 글씨도 휘갈겨 쓸 줄 알았는데.

 

얌마. 너 귀여워서 봐준다.”

…….”

내가 귀여운 거에 좀 약해서.”

 

하고 짓궂게 웃는다. 참나여자후배한테나 하면 먹힐까 말까 한 짓을. 아니다. 오히려 요즘 같은 때 여자애들한테 저랬다간. 이렇게 아저씨 같은 멘트나 치는데 어디가 좋다는 거야? 저렇게 느끼하게 웃고. 종인은 제 어깨를 한 번 꾹 쥐고 창가 쪽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백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그간의 정을 봐서(?) 신고는 안 할 거지만 진짜 저질.

 

 

 

 

 

5

 

수업이 끝나고 백현이 제 친구들과 왁자하게 몰려 있기에 쏙 먼저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얼른 바글바글한 복도부터 벗어나려는데, 어느 틈에 따라온 백현이 부른다.

 

어디 가?”

남이사요.”

 

뒤를 힐끔 돌아봤더니 백현만 잠깐 빠져나왔는지 친구들이 저만치 이쪽을 보며 서있다. 왜 굳이 또 쫓아왔나 모르겠다. 형 친구들 저기 기다리는데. 절루 가요.

 

얼씨구. 왜 기분이 이렇게 별로지. 쪽지시험 잘 못 봤어?”

아니거든요잘 봤어요.”

잘 봤는데 왜 그래. 오늘 몇 시에 들어오나 물어보려고 했더니.”

아 형이 무슨 내 보호자도 아니구!”

 

순간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가 스스로 당황했다. 짜증낼 건 아니었는데, 저도 백현한테 기분 상한 거 하나도 없었는데 순간적으로 그랬다. 정말 예정에 없던 거라서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백현이 말이 없다. 그렇게 잠깐 황당한 표정이었다 픽 한 번 코웃음을 치고는 묻는다.

 

왜 또 짜증을 부리고 그래.”

 

혼날 줄 알았는데, 어린애를 다루듯 누그러진 말투에는 그만 못 이기고 있는 그대로 실토를 하게 된다.

 

배고파서.”

 

어이없어 하던 그가 그 길로 학관 밑에 있는 카페테리아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사설업체에서 상시 운영하는 여기는 그래도 다른 보통 학식보다 좀 맛이 있는데, 항상 두 가지 중에서 메뉴 고민을 하게 된다. 오늘은 A세트는 오무라이스 김치볶음밥이고 B세트는 돈까스랑 우동이다. 1분 고민 끝에 B를 골랐더니 백현이 앞에서 계산을 했다.

 

근데 형은 앙 머거요?”

 

일단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본능에 충실했다. 한참 열심히 먹고 배가 반쯤 차니 제 앞에 팔짱을 끼고 저 먹는 걸 구경하는 백현이 보인다. 오무라이스가 아몬드 모양으로 예쁘게 말린 그대로였다. 안 그래도 끝에 조금 뺏어먹으려고 했는데. 돈가스를 입안에 잔뜩 넣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왜 안 먹어요?

 

나는 먹었지, 바보야. 세 신데.”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턱 끝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킨다. 백현의 말대로 시계바늘이 세 시에 가까웠다. 쪽지시험 보기 직전까지 그가 준 노트를 한 번 더 읽고 가느라고 미처 점심을 못 먹었더니, 시간 감각이 없었다.

 

근데 왜 시켰어요?”

둘 다 먹고 싶다며.”

내가 언제.”

못 고르고 있길래.”

 

그리고 나온 대답에 그만 입이 슬쩍 벌어졌다. 그 얼굴을 보고 그가 웃는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밥도 안 먹고 배고프다고 성질을 부려 못난아.”

…….”

 

못난이 아닌데. 언제는 귀엽다고 해놓고. 우물대며 마저 씹자 불어터진 빵빵한 뺨을 손등으로 톡 눌렀다. 맛있냐?

 

…….”

 

갑자기 거짓말처럼 입맛이 없어졌다. 이상하다.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백현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좋은 사람이다. 그 대신 백현은 솔직하다.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졸라도, 아니라고 얘기해주진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서운하지만, 또 그래도 대체로 다정한 사람이다. 정말 이상하다. 종인의 상식으론 아직 잘 이해가 안 됐다. 흑백으로 사람을 나눌 수 없다는 것쯤은 저도 안다. 알지만. 이렇게 친절한 사람인데,

 

왜 사랑을 모른다고 말하는 걸까.





***

(애기)곰의 (첫)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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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딱히 이사라고 칭할 것도 없는 둘만의 간단한 이사였다. 세훈의 집으로 짐을 옮겼고, 기존에 있던 집을 완전히 정리했다. 어차피 주생활권이 세훈의 동네가 된지 조금 되었었다. 대부분의 큼지막한 짐은 정리가 되었고 한 침대를 쓰니 구조적으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매트리스는 버렸다. 가지고 들어온 것 중에 가구라고 할 만 한 건 종인의 개인 책상이 다였다. 어쨌든 대충 정리는 했으니 축하해야지. 종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훈이 냉장고에서 치즈와 청포도를 꺼낸다. 어제 함께 장봐온 와인 안주였다. 아직 낮이지만, . 휴일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와인 마개를 따려던 세훈이 잠깐 멈추었다. 식탁 위에 턱을 괴고 그의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종인이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이쪽을 쳐다본 세훈의 얼굴이 다소 무표정했다. 이사를 조르며 그토록 고대하던 건 세훈이었는데, 어쩐지 최근 들어 저조해보였다. 평소에도 말이 많다거나 들떠있는 타입은 아닌 걸 감안하고서도 미묘하게 가라앉은 느낌이다. 단순히 예상했던 것보다는 기뻐하는 티를 덜 내는 것뿐일까.

 

변백현 이 근처래.”

 

그리고 내뱉은 말은 전혀 예상 밖의 맥락이다. 괜히 맥이 탁 풀렸다. 묘한 긴장감이 사라진 동시에 던져진 화두에 대한 새로운 긴장이 따라왔다.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것도 세훈의 입에서. 이런 순간마다 늘 필요 이상으로 경직됐다. 그 날 밤 백현은 그대로 저를 남겨두고 돌아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론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접점도 없었고, 두려웠다. 어차피 종인에게 남은 건 매정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뿐이다. 그는 키스하지 않을 테고, 자신은 그를 좋아해선 안 되고, 그 역시 저를 좋아하지 않겠지.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 사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뀌었던 적 없다.

 

... 그래?”

오라고 해?”

 

세훈의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의중인가 싶어 종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단순히 제 의사를 묻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쩐지. 곧 켕기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엮여서 좋을 것 없다는 사실이라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게 정말 질문이라면, 대답은 만나고 싶기도,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답은 하나인데 마음은 두 가지였다. 이런 걸 미련이라고 부르는 걸까. 애매한 기분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그거야 뭐... 니 맘대로 하는 거지.”

둘만 있고 싶다고 말해. 나 진짜 돌겠으니까.”

 

종인은 어중간하게 굴리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번뜩 돌려 세훈을 똑바로 보자 그는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종인으로선 처음 보는 얼굴이다. 황당했다. 갑자기 저렇게 치기어린 으르렁대는 얼굴을 하는 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종인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순간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말을 곱씹었다. 그 욱하는 말투까지도. 둘만 있고 싶다고 말해? 시작부터 그랬듯 아직까지 이 관계는 세훈의 열렬함을 종인이 따라가는 편이어서, 가끔 애석해하는 척 어리광을 부리곤 했지만 갈증을 내는 법은 없었다. 내가 더 좋아하는 건 아무 상관없어. 어차피 계속 그럴 테니까. 그냥, 넌 받으면 돼. 계속. 계속이라고 두 번 말한 데서 그의 마음이 드러났다. 표현은 적었어도 늘 솔직하게 드러났다. 정말 별 생각 없다는 듯 무미한 투로 툭 내뱉어 놓고, 그러나 저는 알 수 있을 그 정도였다. 그 이상은 없었다. 백현은 어디까지나 그의 사촌이고, 적어도 아직은 그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단지 마음대로 하란 말에 화가 났던 걸까. 무책임해 보여서? 아무것도 여전히 관심 갖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애정의 보폭을 맞춰주는 게 좋다는 건, 종인도 그걸 알 만큼은 경험이 있었다. 황당했지만 똑같이 뾰족하게 굴고 싶진 않았고, 종인은 짐짓 순하게 제 의문을 드러냈다.

 

그게 웬... 무슨 말이 그래?”

“...됐어. 그냥, 오라고 한다. 어차피 코앞이래.”

 

어느 새 감정을 갈무리한 얼굴이었다. 더 묻고 싶기도, 따져 묻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세훈이 셔터를 내렸다는 것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뺨이 약간 우릿하게 일어난 채 불퉁한 얼굴로 찬장을 열어 와인 잔 세 개를 꺼내는 세훈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은수누나는?”

자주 못 봐. 걔 요즘 석사 졸업전시 때문에 정신없어.”

전시가 언젠데.”

글쎄, 다음 달 말인가.”

정확히 말해줘야 가지.”

다시 정확히 물어볼게.”

 

아이러니 했다. 그 전에 작은 트러블이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막상 백현이 문 앞에 서있던 이후로는 매끄러웠다. 차가운 물방울이 맺힌 청포도 알을 톡 뜯어내며 얘기하는 세훈의 투며 백현의 대꾸가 평소 같다. 우스웠다. 문이 열린 순간 그 틈으로 멋쩍은 눈인사를 나눴지만 저와 백현 또한 공유되지 않는 서사로 여기에서 겸연쩍게 굴 수는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선선한 인사, 안부.

이거. 찾았어, 큰 캐리어에서. 일부러 빼놓은 거야?”

 

방에서 세훈이 들고 나온 건 비디오테이프였다. 한 눈에 봐도 종인은 그게 뭔지를 알 수 있었다. 비디오 플레이어 자체가 거의 다 없어진 지금에야 별 의미가 없지만, 한 때는 소중하게 간직했던 테이프다. 제 데뷔 무대가 담긴. 이삿짐을 챙길 때 분류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없애기로 결정하지도 못한 것들을 밀어 넣었던 것 같다. 딱히 살림을 산 것도 아닌데 생각 이상으로 잡다한 짐이 많다고 생각하며 아무렇게나 상자에 담았다. 그 중에 저런 게 섞여 있을 줄이야.

 

테이프를 들고 온 세훈이 허리를 숙여 거실 TV 밑에 있던 멀티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집어넣었다. 고사양일 거라곤 생각했지만 별로 관심 없이 봐와서 요즘 같은 때 비디오 플레이어 기능까지 갖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아,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민망할 게 분명했다. 종인 자신도 본 지가 오래돼서 어떤 모습들이 담겼었는지도 뜨문뜨문 기억나는 수준인 만큼 이렇게 무방비하게 공개하기엔 창피했다. 저도 모르게 으- 하며 얼굴을 쥐자 옆에 있던 백현이 작게 웃었다. 지직- 노이즈가 일며 시작화면이 떴다. 요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화질이 떨어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무대는 전체를 중심으로 담았고, 가끔은 줌아웃이 되며 인물이 작아지기도 수 차례였지만 종인에겐 자신 중심으로 보였다. 그들에게도 그렇게 보일까. 세훈, 그리고 백현에게도. 같은 무대를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선 적이 있었다. 국립발레단에 정식으로 고용되고, 수석무용수가 된 이후에도. 워낙 클래식이라 이제는 인이 박힐 정도인 그 무대. 그 모든 게 낯설고 긴장되던 저 날의 감정이 그대로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세훈과 백현은 별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제 옆으로 소파에 앉은 백현은 꽤 집중한 얼굴로 화면만 주시하고 있었고, 러그 위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세훈의 뒤통수도 딱히 미동이 없다.

 

와인 더 갖고 올게. 뭐로 마실래? 본 공연이 끝나고 백 스테이지와 후기 영상 등으로 돌아갈 때쯤 세훈이 접었던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화면에는 객석이 가득 찼다가 이내 공연자들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 앞 다투어 소감을 쏟아내고 환호하는 모습. 제가 저 때 어디에 있었더라. 눈에 펄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화장을 한 채 즐거워 보이는 여자 무용수들이 여러 명 등장하도록 종인은 나오질 않았다. 화이트? 아니면 바꾸지 말고 그냥 레드 마셔? 세훈이 주방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종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종류를 갖고 올 모양이지만, 이왕 레드로 시작한 것은 바꾸지 않는 편이 좋았다. 백현이 손을 내저었다. 난 됐어.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백현은 술이 썩 센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날은 제 쪽이 진창 취할 걸 대비해 적당히 조절했을 뿐이다. 세훈은 술이 셌다. 아마도 처음 깐 와인 병의 반 정도는 세훈이 홀짝홀짝 마셔댄 것이다.

 

“.......”

“.......”

 

한동안 침묵이었다. 세훈이 빨리 돌아오길 기다릴 정도였다. 어느 새 화면에 클로즈업 된 그 당시의 종인이 잡혔다. 서투르고 뜨거웠던 몸짓, 그걸 끝까지 해낸 어리고 풋내 나는 얼굴이 상기된 것까지도 다 보였다. 붉어진 얼굴. 누군가 안겨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약간은 들떠있는 흥분된 말투. 좀 전까지 울었던지 눈 화장이 흐리게 번진 주제에 흐드러지게 웃는다.

 

예쁘네.”

 

정적을 깬 건 백현 쪽이다. 내용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무심한 투였다. 사실은 아까부터 묻고 싶었다.

 

은수가, 애인...이에요?”

 

이 사소한 물음 하나를 하려고 수번을 속으로 억누르며 별러왔던 게 무색하게도, 그는 너털웃음을 지어버린다.

 

애인은 아니고.”

“.......”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안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기가 막혔다. 차라리 애인이라고 말했으면 미친놈 취급이라도 했을 걸. 누구의 이벤트에든 품안 가득 꽃을 안고 근사한 웃음을 지어보일 남자란 걸, 나는 당신에게 야속함을 느껴선 안 되는 그런 사람인지.

 

울지 마, 감당 못해.”

 

나직하게 말한다. 여전히 시선은 화면에 둔 채로. 화면은 이제 다른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뭐야, 이 분위기.”

“.......”

싸웠어 둘이?”

무슨, 애냐.”

 

, 내가 딸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백현이 세훈 쪽으로 손을 뻗었다. 뭐 안 마신다며. 너 따라준다고. 세훈과 그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종인은 러그의 무늬를 셀 듯 줄곧 눈을 박았다.

  




  

14

 

세훈의 출장에 동행했다. LA2주 남짓한 출장이었다. 일정은 넉넉했다. 임원에 대한 보상적 성격이 강한 출장이었다. 세훈은 거기에 며칠의 휴가를 붙여 냈다. 미국으로 2주간 출장이라는 말에 종인이 기네, 하고 대답했고 물끄러미 눈을 맞추던 세훈이 허리를 껴안으며 물었다. 같이 갈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청하는 말에 종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성을 높인 적 없지만 근래 묘하게 핀트가 안 맞고 있고, 리프레시가 필요하다는 데 종인도 동의했다. 마음이 제멋대로 굴러가는 것과 또 다른 문제였다. 노선을 잡아야 했고, 이쪽도 열정이 다했다고 하기엔 아직은 서운한 관계였다. 설익은. 여전히 천천히 끓는점을 향해 오르는 중인. 아마도 백현이 없었다면, 이 관계가 진즉에 끓는점에 오르지 않았을까. 서서히 차곡차곡 꾸준하게, 사랑에 가닿지 않았을까. 종인은 생각했다. 세훈은 그럴 만큼의 충분한 매력도 능력도 있는 남자였다.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한 눈을 판 건 전적으로 제 잘못이다. 으응, 나도 갈게. 하는 어리광 섞인 대답에 기분이 들떠 곧바로 키스해오는 세훈이 귀여웠다. 악순환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평소보다 유순하게 굴게 되는 건. 애정이 없는 게 아니었다. 보면 좋았고, 함께 있으면 그 시간이 평화롭게 흘러갔다. 마주보는 시간. 사랑을 말하는 순수하고 직설적인 세훈. 하지만 자신을 그토록 미치게 하는 감정은.

 

LA에서의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다. 날씨가 환상적이었다. 세훈이 간단한 공식일정을 마친 이후로는 쭉 휴가였다. 강박적인 일정을 잡지 않고 내키는 대로 여유롭게 움직였다. 해변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고, 물에 잠깐 몸을 적시고 나와 커다란 파라솔이 드리운 베드에서 빈둥거렸다. 세훈의 평소 스타일은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휴가 내내 평소 이상으로 기분이 좋아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도 통 지루해하질 않았다. 호텔 룸에 달린 발코니의 아침 경치가 볼 만 해서, 발코니에 일 없이 나와 있다 장난치듯 입을 맞추고 떨어지고 했다. 해를 등지고 선 세훈이 웃으면 빛이 산란하는 듯 보였다. 거기서 만큼은 온전히 한국에서의 모든 일에서 동떨어져 나온 기분이 들어서, 막 한국에 귀국했을 때의 밀려오는 현실감이 퍽 낯설게 느껴졌다.

 

둘 다 제정신이야?”

 

백현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아무렇게나 책상위로 내던져놨다. 이음새를 맺는 금속철이 원목에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화를 내는 얼굴은 낯설었다. 노련한 처세나 화술로 능구렁이처럼 에두르려 했어도 언뜻 숨겨지지 않는 뾰족한 구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쨌건 기본적으로는 유들유들한 타입의 남자였다. 특유의 위트로 무마하려는 데에는 속이 다 뒤집힐 정도였는데. 지금 눈앞에 마주한 그는 상당히 냉랭하고 신경질적이다.

 

귀국하자마자 호출당해 짐을 풀기도 전에 끌려들어온 세훈의 얼굴도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손을 허리춤에 얹고 비딱하게 선 백현은 한소끔 성질을 참아내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하게 서있던 종인과 눈이 마주쳤다. 경솔했다면 둘 다 마찬가지였겠지만 그가 꾸짖을 대상은 세훈이었다. 생각이 짧았다. 종인도 입국장에 들어서서 휴대폰을 켜자마자 울리는 메시지와 전화를 확인하기도 전에 백현의 비서실로부터 호출 당하면서 그제야 깨달았다. 아차 싶었다. 자신들의 존재감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지했다. 누군가에게 포착될 수 있다는 사실도. 제법 알려지긴 했지만 연예인처럼 일거수일투족이 민감하게 다뤄지는 것도 아닌지라 보통 편하게 일상을 영위하다보니 그랬다. 저들이 완전히 일반 사람만큼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을 자꾸만 망각하고 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포되기 전에 인지상정상, 혹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먼저 현선그룹 쪽으로 컨택이 들어온 덕에 백현이 노발대발했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결정적인 건 그의 선에서 커트되었지만 뒤에선 어마어마한 보이지 않는 비용을 감수했을 것이다. 백현이 직접 나서서 손을 쓴 명분은 어디까지나 계열사의 상무이사이자 사랑하는 오세훈의 대외적 평판을 위해서일 것이지만.

 

둘 다 유명인사야.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얼굴이라고. 안 그래도 공연마다 쫓아다닌다고 각별한 인연이니 의외의 친분이니 가십이라고 떠들어대는 판인데, 동반 여행도 모자라서 조심성 없이 스킨십을 하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

막아준 건 고마운데, 이게 형이 이렇게까지 화낼 문제야?”

 

면목 없는 얼굴로 서서 잠자코 듣고 있던 세훈이 처음으로 꺼낸 대꾸는 종인으로서도 의외의 것이었다. 괜히 발끝을 쳐다보고 있던 종인도 고개를 홱 들었다. 세훈은 볼멘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백현 역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숨길 생각 없다.

 

내가 경솔했다, 오세훈. 너 하는 짓은 어지간히 그러려니 하던 게 버릇이 되다보니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책 없이 두고.”

 

짧은 헛웃음 끝에 나온 날선 말투에 세훈은 입을 꾹꾹 다물었다. 세훈도 결국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건 그가 가진 뾰족한 부분이었다. 공격적인 타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담아두고 꿍하게 구는 건 견디지 못해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여려서 지금처럼 싸하게 냉각된 분위기는 더더욱 못 견뎌한다. 그 상태로 잠시 대치했다. 그 사이에서 가장 곤란한 건 종인이었다. 괜한 눈치가 보였다.

 

아 됐고, 나 담배 좀 피고 온다.”

 

손을 홱 저은 세훈이 끊어내고 돌아섰다. 오냐오냐 했더니 이런 꼴을 본다는 제 사촌의 일갈에 대강 입을 다문 것뿐이지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귀찮다는 듯 손을 성의 없이 흔들어 보이고는 금세 잡을 틈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어색한 기분으로 세훈의 뒤꼭지만 쳐다보던 종인과 역시 기분이 덜 풀린 듯 한 백현이 남았다. 당연하게도 적막이 이어졌고, 종인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자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린 백현이 괜히 아무렇게나 던져진 서류철 같은 걸 제자리에 뒀다. 괜히 딴청을 부리는 소리를 들으며 종인도 손톱 거스러미를 뜯는 체 했다. 탁상시계가 똑닥대는 소리, 그가 책상 위를 정리하고 마른손이 잔 먼지에 쓸리는 소리, 바깥에서 멀게 들려오는 작고 사소한 소음들.

 

재밌었어?”

 

적막이 깨어졌다. 갑자기였다. 종인은 고개를 들고 그를 마주했다. 다시 저를 보고 있다. 통유리로 비추는 빛의 역광을 입은 얼굴.

 

뭐가요.”

여행.”

... 재밌었어요. , 보셨겠다시피.”

 

그 말을 꺼낼 때는 조금 민망했다. 어디까지의 수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레짐작만 했다. , 괜히 목을 한 번 가다듬자 아랑곳 않은 백현이 팔짱을 끼며 비딱하게 기대섰다.

 

그래? 난 일이 너무 많아서 하루종일 일만 했는데. 더구나 누가 일을 얹어주신 덕분에.”

“......?”

“LA가 요즘 햇볕이 별론가봐.”

 

그리고는 다시 한동안 정적이었다. 백현은 알 수 없는 말을 해놓고는 다음 말이 없었고, 종인도 대꾸할만한 적당한 답을 찾지 못했다. 짐짓 다른 일에 열중한 체 한다. 그는 다시 책상 앞에 서 한참을 산만하게 부스럭거리다 양손으로 제 책상을 짚고 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말을 고른다는 걸 알 수 있다. 조금 전 던져놓은 말은 비꼬는 투로 들리기도 했다. 종인은 계속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히, 화내는 얼굴보다도 낯설었다. 변백현은 늘 농담마저 철저히 계산되고 절제된 듯한 남자로 느껴졌다. 적정한 선을 지키는 데도 이골이 났을 법한. 맨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다. 지나치게 생략되어있고, 의중을 선뜻 파악할 수 없었다.

 

많이 안 탔네,”

“.......”

 

특히 이렇게, 차가운 것도 뜨거운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은.

 

호텔에만 있었나.”

 

얼떨떨했다.

 

뭐에요..., 그 말투.”

 

턱을 치켜든 그의 뺨 께가 약하게 붉어져있다. 종인은 저도 모르게 백치처럼 입을 벌리고 말았다. 온몸에 전류가 흐른다.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이 기분을.

 

 

 

 

 

15

 

방문을 열었을 때 백현이 보이질 않았다. 세훈은 자연스레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휘적휘적 걸었다. 좁은 통로를 지나 드레스룸 문을 불쑥 열자 셔츠를 입은 백현의 등이 보였다. 여깄네, 이 양반. 타이를 매던 백현이 고개를 젖혀 돌아보았다. .

 

뭐해. 출근 준비중?”

어어, 왔어. 웬일이야, 아침부터.”

외할아버지가 잠깐 들어오라고 하셔서. 아직 안 일어나셨대. 뵙고 아침 먹고 가려고. 출근 같이 하자. 나 데려다줘, 차 안 끌고 그냥 넘어왔어.”

그래.”

 

그 때 이후 사적으로는 처음 대면이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두어 번 본 게 다였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있는 자리라 어중간하게 피해올 수 있었다. 크게 문제가 될 지경도 아닌데 어쩐지 정면으로 부딪칠 작심이 들질 않았다. 저를 대하기 어려워하긴 백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법도 했다. 여지껏 한 번도 그와 언성 높여 다투거나 감정 상한 적이 없었다. 이건 백현과 세훈 둘 다에게 처음 겪는 상황이니,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암묵적인 룰조차도 없었다. 한 번도 서로 어떤 을 해야 하거나, 마음에 없는 불편을 감수해야했던 적이 없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내는 건 세훈으로서도 큰 노력이었다. 백현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는 듯 했지만 노련함일 뿐, 결코 평소와 같진 않았다. 행여 다른 사람은 눈치 못 챌지 몰라도 둘만은 안다.

 

왔어, 우리 오 이사.’

 

세훈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연스레 그 말이 뒤따라야 했지만 혀가 굳은 듯 입안에 꺼끌하게 맴돌았다. 백현은 스킨십에 박한 편이 아니었다. 세훈의 나이가 이십대 중반이 넘도록 손을 태웠다. 평소대로라면 별 생각 없이 뺨이라도 한 번 툭 쓰다듬었을 터였다. 실제로도 나이차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백현은 늘 세훈을 실제보다 아주 어린 동생 대하듯 너그럽게 다뤄왔다. 세훈 역시 거기에 지나치게 익숙했다. 마음이 좀 상했다고 서로 데면데면하게 굴었다지만 비단 지난 며칠이고 20년이 넘게 그런 방식에 길들여져 왔으니 당연하다.

 

어색했다. 정확히 말하면 어색하다는 것 자체가 낯설다. 세훈은 그와 형제처럼 자랐다. 사촌 이상이었다. 종인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백현을 사랑했다. 아니, 종류는 다르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종인은 제게 조바심을 내게 하는 상대이고, 백현은 제가 의지하는 존재란 게 다를 뿐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줄 거란 배짱을 부려도 좋을 것 같은 사람. 처음 현선패션의 상무이사 보직을 받아 일하기 시작하고서야 알았다. 백현이 재계에서 전형적인 기업가 체질이라는 평을 듣는다는 것을. 유연한 척 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냉정하고 교활해서 젊은 녀석 같지가 않다는 평판. 그 전에는 집안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아 몰랐다. 그제껏 세훈이 아는 백현은 자신을 대하는 백현이 다였다. 늘 저에게만은 물렀다. 어떤 꼬장을 부려도 모르는 척 넘어가주었고, 엇나가자면 붙잡고 달랬다. 나는 그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이구나. 라고 확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자유롭고 아름다운 남자였고, 세훈의 엄마가 가진 돈이나 배경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사랑이었고, 성애이기도 했다. 그 산물인 세훈. 그녀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어린 세훈은 자연스럽게 본가로 들어왔다. 제 아버지가 상주인 빈소에 황망한 얼굴로 찾아온 큰외삼촌이 털썩 무릎을 꿇고 앉던 것을 세훈은 기억했다. 그렇게 나갔으면 잘 살기라도 할 것이지.... 가장 아끼던 여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의 옆에서 그의 부인이 세훈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았다. 세훈은 제 아버지와 건조하기 짝이 없는 악수를 나눈 큰외삼촌 부부의 손을 양쪽에 하나씩 잡고 돌아왔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게 끝이란 걸 알았다. 그는 뼛속까지 춤을 추는 남자였고, 자기자신의 슬픔만도 가누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렇게 따라간 본가에서 백현을 만났다. 우와, 나 동생 갖고 싶었는데. 너 수현이 있잖아? 에이, 수현이 말고요. 수현이도 예쁜데, 나랑 같이 축구도 하고, 공부도 같이 할 동생이요. 그 때는 세훈보다 키가 컸던 백현은 제 부모에게, 엄마아빠가 안 낳아주셨잖아요- 바쁘다구. 전 남동생도 갖고 싶은데. 하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그 일가에서, 백현은 유일한 숨통이었다. 그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회장의 냉대와 다른 친지들의 엄혹한 시선은 어린 세훈에게 상처로 남았다. 그 집에서 제 말을 경청해주는 건 변백현 밖에 없었다. 숨이 막혔다. 결국엔 견디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들어갈 때쯤 통학권의 오피스텔에 나와 살았다. 나가지 말라고 붙잡은 것도 백현과 그의 부모, 기어이 나가겠다고 했을 때 집을 마련해준 것도 백현이었다. 늘 노인의 기껍지 않은 시선을 마주하는 게 두렵고 울렁거려 어린 마음에 도망치고만 싶었다. 명절에도 잘 가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오지 않아 노인이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권세와 재산 모두를 가진 조부 밑으로 예외 없이 머리를 모으는 일가의 체제 속에서 세훈은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겉돌았다. 그럼에도 백현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저를 불러들였다. 스무살. 성인이 되어 몇 년 만에 노인을 마주했을 때. ‘그거, 인물값 좀 하겠구나.’ 칭찬이 아니었다. 그는 경멸하고, 미워했다. 제 아버지를 닮은 선이 또렷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세훈은 아직도 노인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 깔려있던 그 경멸을 기억했다. 그래, 당신에게 나는 결국 변씨가 아닌 오씨라는 걸 안다.

 

현선패션, 세훈이 주시죠. 오 상무 일 잘합니다. 추진력도 좋고, 감각도 있어요. 회사를 어지간히 크게 키워놓으셨어야죠, 회장님이.’

 

계열사가 몇 갠데, 저 혼자 감당 못해요. 같이 하시죠. 그렇게 승부수를 던지던 백현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눈웃음을 흘렸다. 함께 돌아나오던 백현은 여직 긴장된 제 어깨를 짐짓 거칠게 쥐고 머리를 헝클어 놓으며 진심으로 웃었다. 뻣뻣하게 있지 말고. 좀 귀염도 떨고, ? 언제 클래 꼬맹아. 키는 이미 한 중학생 때 이후 제가 더 컸는데도,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 그가 크게 느껴졌다.

 

그래, 자네 일 제법 해놨데. 좀 두고 보자, 오 이사.’

 

그렇게 노인에게 처음으로 받은 인정. 늘 출신부터 미덥지 않다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작아지게 만들던 회장이었다. 눈시울이 왈칵 뜨거워져 울음이 나올 것도 같았지만 꿋꿋이 참고 울지 않았다. 그럼 오 이사 데리고 나갈게요, 형제끼리 할 얘기도 좀 있고해서. 황은이 망극합니다, 할바마마. 능청을 떨던 백현이 대신 웃었다.

 

사실 입사 초반에는 막상 자리를 받아놓고서도 마음을 잡기가 어려웠다. 회사내의 텃세도 만만치 않았고, 다른 형제들의 견제와 초대형 낙하산이라며 뒤에서 수근대는 직원들의 비우호적인 태도에 오롯이 노출되었다.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세훈은 악의에 취약했고, 본질적인 외로움을 탔다. 어차피 직급으로 보나 출신으로 보나 출근이 불규칙하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자리도 아니었다. 제 얼굴에 그렇게 깽판을 내도 백현은 나무라지 않았다. 얼굴 보기가 미안하고 민망해 고개를 푹 숙인 세훈의 귓불과 뺨을 가볍게 터치했다. 니 반은 변씨니까. 너 은근 에프엠인 구석 있어. 영감님 손자 맞아. 그 때는 울었다. 어차피 백현 앞에서였고, 눈물을 참을 이유도 없었다. 정기적으로 출퇴근을 하게 된 건 그 때부터였다. 이번에 노인이 저를 불러들인 건 아마도 전무이사 승진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결국엔 비슷비슷한 자식들의 각축전인 콩나물시루 속에서 제 앞으로 운을 띄워놓은 것도 그일 테고, 그 우산 속에서 제 몫을 성실히 해왔다. 그 인내와 애정에 보답하고 싶어서. 잘했다는 칭찬을 받고 싶어서. 다 키웠네, 오세훈. 기특해 죽겠다는 듯이 웃는 얼굴도 보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했다. 이제 '진짜' 임원이 코앞에 와있었다.

 

백현이 타이를 마저 조이고, 향수를 가볍게 얹고, 드레스셔츠의 칼라를 매만지는 동안 세훈은 거울이 많은 드레스룸을 휘 돌아봤다. 잘 다려진 드레스셔츠의 진열이 마치 매장의 그것처럼 가지런하다. 무심코 둘러보다 멈칫했다. 따로 밖으로 꺼내져 구석에 놓여있는 셔츠. 자연히 시선이 거기에 머물렀다. 없다.

 

“.......”

 

비어 있는 커프스. 있어야할 곳에, 단추가 없었다.

 

세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손목시계를 꺼내드는 백현의 셔츠 소매를 약하게 잡아당겼다. 금세 돌아본다. ? 다정한 눈. 이 거리와 관심이 이렇게 익숙한데.

 

말해줘 형. 그 때 왜 그렇게 화를 냈어? 단지 나를 위해서? 형이 그렇게 아끼고 공들여 만든 내가, 조심성 없이 구는 게 화가 나서? 제발 그렇다고 말해. 왜 그런 얼굴을 했어.

 

.”

.”

나 진짜 형 좋아해.”

.......

알지. 나한테 중요한 사람 몇 안 되는 거.”

.......

“...나 힘들게 만들지 마.”

 

내가 형 미워하게 하지마.

 

“...그래.”

 

백현은 무슨 말이냐고 묻지 않았다.

 

 

 

 

 

16

 

백현이형, 은수누나랑 약혼할 거야.”

?”

 

종인이 들고 있던 머그를 조심성 없이 내려놓았다. 곧은 나무 같은 종인의 손끝이 팽팽한 걸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음 달 쯤에. 발표하고 바로 약혼식 얘기 나올 것 같아.”

갑자기 웬...”

왜 놀라.”

 

냉정하게 끊어내자 정적이 흘렀다. 세훈은 짐짓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일 것도 아니지. 다들 암묵적으론 예상하던 거였다고 했잖아. 그냥 변백현이 이기적이었던 것뿐이야. 결국 이렇게 될 거 지도 다 알면서.”

 

어제 본가에서 한달에 한 번 꼴로 있는 가족 저녁식사 후에 나온 얘기였다. 자식들이 회장의 건강을 묻고 서로 상투적인 안부인사가 오가는 식사가 끝나면 응접실에 모였다. 다과를 함께한 간단한 담소라곤 하지만 사실상 일가가 소집되어 둘러앉은 자리이고, 늘 그렇듯 감히 불참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회장.’

 

소회장, 회장은 백현을 그렇게 불렀다. 과히 살가운 투야 아니었지만 어찌 말하면 그마저도 그 강팍한 노인에게는 애칭이라고 볼 수도 있을 터였다. 흔히 젊은 날 무뚝뚝하고 제 자식이 귀여운 줄 모르던 사내들이 그렇듯, 노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장남인 백현의 아버지에 대한 부정도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손자인 백현에 대한 노인의 신뢰와 애정은 다른 사람들이 가늠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 일가의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수차례 회장의 크고 작은 언질에서 확인해왔다. 소회장. 작은 회장이라는 뜻이었다.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현선그룹의 몸통인 현선전자의 사장으로 백현의 아버지가 있었고, 백현에게는 부사장 자리를 내주었다. 에이, 회장님. 자꾸 그렇게 부르시면 민망해요. 백현이 몇 번 손사래를 치며 겸연쩍은 기색을 보여도 노인은 아랑곳 않았다. 누가 회장이랬니? 민망할 것이 어디가 있어, 안 그런가? 어때, 내 말이 틀려? 노인이 짐짓 목소리를 키우며 응접실의 긴 테이블에 둘러앉은 좌중을 돌아봤다. 아버지인 변석진 사장이 껄껄 호탕하게 웃기에 망정이었다. 열심으로 하라, 다 일구는 대로 결국에는 자네 것이 된다. 담배를 피울 때 조용히 따로 부르는 것, 어깨를 세게 쥐었다 놓는 악력. 그게 노인의 최대의 애정표현이었다. 아주 은근하지만, 모두가 알 수 있는 종류의 것.

 

이제 가정 꾸려야지. 은수양도 더 기다리게 할 수 없고. 젊은 처자가 무정한 사내 하나 때문에 여태 바라보고만 있질 않아? 그리구 그 댁 양친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는 거, 예의가 아니다.’

‘.......’

자네, 내 말 거스르는 적 없잖니. 뭐 부족할 것 없는 사람이, 어째서 기어이 결혼만은 못 하겠다는 이야기야?’

 

노인이 결혼과 자식 이야기를 들이밀기 시작한 건 이미 족히 10년은 된 일이다. 백현이 성인이 된 이후로 틈만 나면 이제 법적으로 성인이니 거리낄 것도 없질 않느냐며 별러 왔다. 우리는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르다, 기업가 집안에 있어 결혼은 중대사다. 시대가 변했다는 핑계는 노인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현은 나름대로 꿋꿋했다. 매번 완곡한 거부에 대한 서운함에 뒤따라 몰아치는 서릿발을 생각하면 퍽 대견하게 버텨왔다. 번번이 미뤄왔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일을 막 배우기 시작해서,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당장 가정에 충실할 수 있을지 몰라서. 노인도 때때마다 그 상황에 맞는 논리로 요모조모 융통성까지 발휘해가며 결혼이 가당한 사유를 들어왔다. 그 때마다 백현은 침착하게 설득했다. 매번 쉽지 않은 싸움이었고, 백현이 노인의 뜻에 반기를 들고 고집을 쓰는 건 꼭 그 하나였다. 이십대 후반에 들어선 이후로는 줄곧 아직은 일이 더 중하고 더 자리를 잡을 때까지 라는 게 유일한 방패막이였다. 저 집에나 잘 들어갈지 모르겠어요 회장님. 결혼은 해놓고 와이프 혼자 두는 것도 너무 멋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멋대가리 없는 놈 되란 말씀 아니잖아요. 회장님, 아이 할아버지- 끝내는 유들유들하게 굴며 아양으로 간신히 넘어왔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이제는 마음에 없어서 가 아니면 더는 핑계가 없을 단계에 이르렀다. 노인의 인내심에 바닥이 드러났고, 더 이상은 막다른 길이었다.

 

? 자네도 생각을 해봐. 내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나?’

 

번뜩이는 눈에는 여직 총기가 가득했다. 기력이 성성한 노인은 무릎위에 얹어져있던 백현의 매끈한 손을 덥썩 끌어다 잡았다.

 

변백현.’

네 회장님.’

내 장손, 변백현이. 이 변도섭이의 귀-한 장손. 증손주, 보게 해 달라.’

‘.......’

할애비 부탁인데, 대답 않는 거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자네를 많이 닮았으면 좋겠구만.’

 

마침내 체념색을 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세훈은 그가 고개를 떨군 것을 처음 보았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은. 늘 자신감과 여유만으로 빛나던 사람이 빛을 잃은 얼굴로 잠자코 앉아있었다. 머리에 맴돌았다. 낙담이라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다. 가져보지 못한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었다. 앞으로도 다시 두 번은 없을 것이다. 생전 결핍을 모르는 그 말간 얼굴을, 세훈도 사랑했다. 이기지 못할 암초에 부딪쳐 그렇게 괴로워하는 얼굴 같은 거, 변백현의 포기 같은 거, 상상도 해본 적 없다. 형이 그래선 안 되지. 그걸 나도 아는데. 체념이 짙은 그늘진 얼굴이 남아 가슴 한 구석을 먹먹하게 틀어막는다. 괴로웠다. 제게 안정감을 주는 사람,

 

어쨌든 그러니까 너도,”

 

그런 얼굴 하지 마.

 

제발, 종인아.”

 

저를 휘두르는 존재. 이렇게까지 등신 같이 굴 정도로, 앞뒤 없이 원해본 적 없단 말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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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는 부분 곧 나와요 분명한 건 아주 멀지는 않았어

  절정에 가기 너무 힘둘다 죽음의 트라이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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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미 소프틀리


매리엇




8

 

문득 생각 날 때면 막연히 답답하고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종인으로선 도저히 백현의 속을 알 수 없었다. 그 날 자연스럽게 번호를 교환했지만 그 뿐이다. 달라질 건 없었다. 종인도 인정했다. 이건 아직까지 실연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고,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도 스스로에게조차 민망했다. 그렇지만 화가 났다. 당신도 나도 어린애가 아니잖아. 말한 적 없지만 그건 명백한 호감의 표시였고, 교활한 방식이었지만 그건 여전히 거절이었다. 눈을 피하지도 않던 그 얄미운 미소를 생각하면 마음이 뭉쳤다.

 

웬일이야? 우리 회사까지.”

“.......”

 

저 얼굴이었다. 늘 종인을 못 견디게 하는 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하게 웃으며 반가운 체 하는 얼굴. 그래 맞아. 엄밀히 말하면 그의 얼굴이 말하는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난 적 없다.

 

내가 부사장인 건 알고 있는 거지?”

알아요. 입구에서 누구시냐고 되게 꼬치꼬치 묻던데. 귀찮았어요.”

문자온 거 못 봤으면 못 들여보낼 뻔했어.”

 

앉아. 하고 말한 백현은 제 책상 쪽으로 걸어가며 턱짓으로 물었다. 인터폰을 누르곤, 차 마실래? 커피? 하고 묻는다. 커피요. 차갑게 주세요. 곧 비서의 목소리가 인터폰 너머로 낭랑하게 들려왔다. , 손님은 아이스커피. 난 차로 해줘요. 커다란 책상을 돌아온 백현이 맞은편에 앉는다. 조간 임원회의에서 막 돌아왔다는 그는 재킷까지 갖춰 입은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갑갑한 듯 재킷을 벗어 옆자리에 겹쳐두는 것을 천천히 눈으로 좇았다.

 

참고로, 오 이사 있는 회사는 맞은 편 건물이야."

“......."

알면 됐고."

 

테이블 위로 얌전히 놓인 찻잔을 집어 들며 백현이 힐끗 제 안색을 살폈다. 습관인 듯한 유려한 미소에 시선이 끌렸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그게 반대로 화살이 되어 악다구니를 쓰고 싶게 만든다. 정말,

 

들렀다 가지? 좋아할 텐데. 오세훈이 은근히 이벤트에 약하..."

 

형편없구나, 당신.

 

들르면요. 여기에 먼저 왔었다는 말도, 해도 돼요?"

“......."

나랑 장난해요?"

 

종인도 마음만 먹으면 내키는 대로 굴 수 있는 면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별로 그러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이제껏 전혀 그런 적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 오히려 변백현이나 오세훈 같은 겉만 번드르르한 바보들보다도 자신은.

 

존나... 후지다 진짜.”

“.......”

오세훈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얼굴 보고 싶은데 볼 일이 없어서 여기까지 온 거 알면서. 왜 그래요.”

 

울컥하는 심정에 짜증스레 쏘아붙이자 그는 입술을 열었다 달싹이며 다시 다물었다. 이때껏 제 속을 뒤집던 화려한 언변을 보이지도 않는다. 이렇게 막상 있는 그대로 들추고 들면 점잖은 체 하느라 말도 못하고 제 눈치나 살필 거면서. 밉다.

 

종인은 한 번도 원하는 걸 갖지 못하게 되어본 적 없다. 언제 무엇이든 수월하게 가질 수 있었고, 제가 가질 수 없을 양이면 제게 마음을 쓰는 누군가가 가질 수 있도록 해줬다. 춤을 추는 사람의 결핍이라고 쉽게 말했지만, 실은 그 결핍이 통렬했던 적 없으니까.

 

백현이 말을 아끼는 쪽을 택했다고 해서 그게 제게 숙여주겠다거나 제 뜻대로 휘둘려주겠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다. 알고 있었다. 어려운 남자란 것쯤. 그래서 더 속이 상하고 자존심도 아팠다. 언제는 마치 작업을 거는 남자처럼, 열에 채인 제 속내를 애써 감추려는 것처럼 점잔빼는 얼굴을 입은 변백현이었는데. 어느 새 돌아보면, 이렇게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오세훈의 사촌형인 체를 한다. 그게 막연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괴로웠다.

 

 

 

 

 

9

 

세훈은 꼭 그의 풍족한 경제적 여건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충분히 향유할 만큼의 다듬어진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적당히 사치스럽고, 적당히 트렌디했다. 세훈과 만나면서 종인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여가 같은 것이 다양해진 건 단지 그가 평균보다 월등하게 부자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특히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백화점이나 명품 갤러리는 흔한 데이트 장소 중 하나다. 어차피 매번 밥먹고 섹스만 할 순 없었고, 그렇다고 항상 해외로만 나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옷에 관심이 많아 늘 굉장히 세련되게 갖춰 입는 세훈에 비해 종인은 큰 관심은 없었다. 기존에 갖고 있던 몇 벌의 질 좋은 옷이나 선물 받은 것을 잘 조합해 입는 정도였는데, 스타일이 좋은 탓에 적당히 입어도 태가 났다. 세훈은 '내가 너였으면 옷을 천 벌은 샀을텐데.'하고 아쉽다는 듯 말했지만 '니가 입는 게 더 멋있어.'라고 말해주었을 땐 아이처럼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직설적인 칭찬에는 어색해하면서도 기분 좋은 걸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 평소의 자로 잰 듯한 미남과 퍽 다르다. 그렇게 말했어도 워낙 본인이 관심이 많은 탓에 자주 같이 나오게 되었고, 본인 옷을 고르러 나왔다가도 종인에게 몇 번씩이나 갈아입혀 가며 만족해했다. 입고 나오는 족족 맞춤옷처럼 늘씬하게 어울리는 걸 보고 비죽이 올라가는 입꼬리에 귀찮다는 말도 못하고 몇 번이나 옷을 바꿔입다보면 어느 새 제 손에도 잔뜩 들려있었다. 하지만 하필 이런 곳에서 새로 산 럭셔리 브랜드의 쇼핑백을 든 여자와 함께 서있는 변백현과 마주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어어, ? 은수누나!”

 

반가워하는 세훈의 목소리가 먼저 튀었다. 저와 먼저 마주쳤던 시선을 거둔 백현이 손을 들어보였고, 그의 옆에 선 여자가 웃으며 '세훈아.'라고 부른다. 세훈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인 여자의 존재를, 어째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건지 스스로의 나이브함에 놀랄 지경이었다.

 

이 쪽은 유은수. 완전 어릴 때부터 알던 누나야.”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냐며 백현과 농담을 주고받던 세훈이 같이 커피라도 한 잔 할까? 말을 꺼내며 제 눈치를 흘끔 살폈다. 종인은 어중간한 심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누나도 오랜만이고, 나도 종인이랑 같이 왔는데. 라고 약간 들뜬 것처럼 말하는 세훈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백현이 음료를 가지러 일어난 동안 세훈이 여자를 소개했다. 집안끼리 친해가지고. 그의 소개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목례하며 웃는 얼굴은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은은하게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이나 카디건에 감싸인 가녀린 어깨가 예뻤다. 아마도, 백현의 말을 잘 듣는 여인.

 

뜨거워. 좀 우러날 때까지 둬."

 

여자가 주문한 티가 담긴 컵의 리드를 무심히 벗겨주며 말한다. 자연스러운 챙김을 받는 게 익숙한 듯 은수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 요란한 광경도 아니었다. 물 흐르듯이 매끄러웠다. 그 모습을 보던 세훈이 소리 내 웃었다. 맞아. 누나가 얌전하게 생긴 것 치고 덤벙대지 좀. 민망한 듯이 웃는 여자의 얼굴은 사랑스럽다. 백현은 옆에서 제 몫의 커피가 담긴 잔이나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시선이 진득하게 엉겼다. 백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미 식사를 해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밥이 얹혔을지 모른다. 그렇게나 요리조리 잘 도망 다니면서, 왜 이럴 땐 피하지 않아요. 세훈과 그녀가 안부를 나누는 것 외에는 조용한 카페의 테이블 위로 끈질긴 시선이 이어졌다.

 

두 사람과는 그렇게 커피를 한 잔 하고 헤어졌다. 카페를 나와 갤러리의 이쪽과 저쪽으로 방향을 달리하는 길목에서 갈라섰다. 이 다음 모임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비어서 잠깐 들른 거였다는 백현의 말에 은수가 세훈을 보고 말했다. 세훈이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정수오빠랑 지현이도 온대. 혜주도. 다들 궁금해 할 텐데. 본지 오래 됐지? 하고는 눈을 예쁘게 접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종인씨랑 보내는 게 훨씬 재밌겠지? 그녀보다 조금 뒤에 서있던 백현이 눈살을 조금 찌푸려 웃으며 나무랐다. 쓸데없는 소리해서 부담주지 마. 나무라는 투에 은수가 어깨를 움츠리며 작게 웃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 어깨를 살짝 제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세훈에게는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내일 반납해라. 오오, 변백현 찬스. 세훈이 어린 소년처럼 표정을 쓰며 좋아했다. 세훈에게 분명 천진한 구석이 있지만 사실 연인의 입장에서 마냥 애 같은 남자는 아니었는데도, 지금은 꼭 어리광을 받아주는 손위의 형제를 둔 보통의 어린 남자 같이 느껴졌다. 더구나 본인이 경제적으로 제약을 받는 처지도 전혀 아니면서, 마치 드문 기회가 주어진 것 마냥 꼭 비싼 거 먹을게- 하고 농담을 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이상한 미시감이 들었다. 그들 간의 자연스러운 보통의 형제 같은, 아니 보통보다는 조금 각별한 관계가 마치 큰 부자연스러움처럼 끼쳐들었다.

 

그에게 만나는 여자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자신의 감정에만 매몰돼 있었기 때문에 거기까진 종인이 생각해보지 못한 변수였다. 손을 잡고 있진 않았지만 느껴지는 자상함과 편안한 거리는 연인의 것이었다.

 

그 분은, 여자친구야?”


맞은편에서 잘 익은 스테이크를 작게 써는데 막 집중하던 세훈이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세훈은 이 식사를 위해 백현이 건넨 카드를 함부로 쓰진 않을 것이다. 그걸 엄청 신난다는 듯이 덥석 받아든 건 아마도 그들의 관계성이겠지. 어쩌면 생각보다 편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긁어버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 또한 역시 정말로 세훈이 제 카드로 할 여유가 없어서도 아닐 테니까. 그저 그는 세훈이 당연하게 믿는 남자이니까. 참 좋은 관계다, 라고 생각했다.

 

너 용케 거기서 안 물어봤네. 사실 나도 아까 소개할 때 좀 고민했는데... 글쎄, 여자친군가. 여자친구지? 좀 애매하네.”

그게 뭐야.”

뭐 은수누나는 애인이라고 생각할 테고 변백현은 아닐 테니까.”

“.......”

정확히는 누나도 결혼할 거라고 믿고 있는 거지.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다들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직까지도 백현이형이 딱 여자친구라고 얘기한 적은 없긴 한데, 그래도 그런 거 있잖아.”

“.......”

 

커틀러리를 내려놓은 세훈이 등을 뒤로 젖혀 앉았다. 괜한 말을 걸어 입이 짧은 세훈의 식사를 멈추게 한 건가 싶었지만 세훈은 이미 곰곰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 만났어도 결국엔 돌아왔었으니까.”

 

은수누나가 그 자리에 계속 있었던 걸 수도 있고. 라고 덧붙인다. 점점 종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뭘까, 단지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말한 것보다 더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마 그녀에게도 과히 행복한 관계의 정의는 아니겠지만. 입맛이 뚝 떨어진 종인이 마저 커틀러리를 한쪽으로 몰아두었다. 그럼 그 때, 백현이 가장 사랑했다던 연인은.

 

그냥 암묵적으로. 형도 어차피 결혼한다면 은수누나랑 하게 될 거란 거 알고 있을 걸. 약간, 공식 며느리 같은 거? 옛날부터. 외할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걸? 가족행사 때도 몇 번 부르셨어.”

그러니까, 대체 그게 뭐냐구....”

 

길게 꼬았던 다리를 풀고 테이블에 바짝 붙어앉은 세훈이 우스꽝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며 웃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난 모양이었다.

 

나쁜 남자지 변백현? 사실 좀 그래.”

 

그렇게 말했지만, 웃는 세훈의 얼굴은 진심으로 백현이 나쁘다는 뜻을 담고 있진 않다. 백현이형이 매너가 좋잖아. 나한테 직접 보여준 적은 두세 번 밖에 없는데, 주변에 여자도 많을 걸. 은수누나가 괜히 고생이지. 왜 변백현을 좋아해서.

 

어쨌든 누나 전시나 그런 거는 꼬박꼬박 가니까 형이. 아마 이번 졸업식도 꽃 들고 갈 거고.”

 

그 정도면 오히려 매너가 나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10

 

황당했다. 아침 일찍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현선그룹 홍보실 문화예술재단팀의 김유건 팀장입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통화 괜찮으십니까?

 

잠이 다 깨기도 전에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받은 전화의 결론은 재단에서 선정한 올해의 예술인에 제가 들어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제가 뜬금없이 현선이 뽑은 3인에 선정되었다라고? 잠이 확 깼다. 이렇게 아무런 언질이나 절차도 없이? 더구나 현선그룹은 제게는 어느 시점부터 더 이상 중립적인 집단이 아니다. 재벌그룹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문화인을 후원하거나 하는 건 드문 일도 아니지만 하필 현선그룹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세훈의 회사였고, 동시에 백현의 것이다.

 

당장 따져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안내받은 장소로 찾아오긴 했지만, 막상 오늘이 당장 그룹에서 반기마다 내는 문화 매거진에 싣기 위한 인터뷰와 사진촬영을 진행하는 날이란 걸 알았을 땐 정말 한계였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너무나 급작스런 통보에 급작스런 진행,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 황당함에 합당한 설명을 해주기엔, 세훈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고 제게 따로 귀띔해준 적도 없었다. 세훈의 성격에 이게 만약 서프라이즈라면 어떻게든 티를 내고 싶어 힌트라도 줬을 터였고 애당초 그렇게 속내가 겹겹이 가려진 남자도 아니었다.

 

현선그룹 사람들.’ 대충 콘셉트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관계자가 건네준 지난 호 매거진을 성의 없이 뒤적였다. 여전히 황당함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이건 지나친 겸손의 문제가 아니다. 하루아침에 불려와 일사천리로 참여하는 인터뷰 치고는 메이크업도 사진 촬영의상도 지나치게 프로 수준이고, 관계자도 지나치게 많다. 무대 화장만큼 화려하고 진하진 않지만 만만치 않게 공들인 메이크업을 하고 앉아 있으려니 현실감이 없었다. 지금은 톡톡한 크림색의 터틀넥 니트를 입었지만 조금 있다가는 발레 콘셉트를 살리기 위한 조금 더 타이트하고 화려한 쿠튀르로 갈아입을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통 집중이 되질 않아 아무렇게나 책장을 펄럭였고, 밑에 켜켜이 쌓여있던 고급 용지로 된 매거진이 밀려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어...,”

보기보다 조심성이 없네 이쪽도.”

 

시야로 불쑥 들어온 손이 먼저 책들이 처참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막아냈다. 익숙한 아름다운 손. 고개를 들자, 예상했던 대로다. 멀끔한 얼굴을 한 백현이 거기 서있었다. 한 대 쳐주고 싶네 정말. 종인은 입술을 부루퉁하게 비죽였다.

 

한 눈이나 팔고. 자꾸 손 가게 하고 말야.”

뭐예요.”

인터뷰 준비는 잘 되나. 처음 해보는 건 아니잖아?”

아니, 이게 다 뭐냐구요.”

 

단정하게 채워져 있던 더블재킷의 버튼을 풀어낸 백현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탁자 위에 놓인 매거진 한 권을 집어 펼치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한다.

 

그렇게 됐네.”

뭐가 어째요.”

내부적인 거야. 어차피 이게 국가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 그룹에서 문화예술 후원 차원에서 뽑는 거니까.”

 

발끈한 종인이 집요하게 노려보자 그제야 백현이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왔다. 의심이 가득한 반항적인 눈초리에 서글서글하게 씩 웃어보인다.

 

올해 문화 쪽은 너, 소프라노 서진아 씨, 그리고 김경필 화백. 이렇게 선정됐어.”

“.......”

전혀 내 입김은 아냐. 마음 놓고 자랑스러워해도 돼.”

“.......”

뭐냐면,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란 뜻이라구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종인씨.”

 

기어코 미심쩍다는 표정을 종인이 지우지 않았던지 바람새는 웃음을 지은 백현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해보였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에, 온갖 국제무대에서 러브콜을 받는 전도유망한 발레리노인데. 수상할 게 뭐가 있어?”

말은 잘 하죠.”

진짜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니까.”

왜 왔어요? 오늘은 회장님도 안 보이시는 것 같은데.”

 

체념한 종인이 화제를 대강 전환했다. 더 따져봤자 원하는 답을 얻을 것 같지도 않았고, 백현의 말마따나 제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낮은 자존감도 아니었다. 원래 현선그룹은 일을 이렇게 정신없게 하나 보죠. 번갯불에 콩 볶아 먹기. 번갯불에 후딱 볶은 콩 치고는 제법 공들인 세트 같긴 하다만. 종인은 책을 아예 덮고 주위 세트장을 휘 둘러보았다. 분주히 뛰어다니는 스태프의 규모도 적당하고, 장비나 세트 등이 그럴싸하다. 오늘 사진 촬영을 맡아주기로 했다는 포토그래퍼가 눌러쓴 베레모에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도 적당히, 전형적이다. 공식행사인가. 제가 첫 순서이고, 다른 두 선정자는 조금 뒤에 차례로 도착할 거라고 들었고, 이쯤 되니 나름대로 식이 있는 행사인가 싶기도 했다. 늘 그렇듯 근사한 정식의 슈트를 빼입은 백현을 넘겨다보며 투정 반, 불만 반으로 따지듯 묻는다. 왜 왔어요? 또 개회식이라도 해요? 백현이 대답했다. 그의 손목에 걸쳐진 백금시계가 빛에 반사되어 화려하게 빛난다. 그냥,

 

너 잘하나 볼까 하고.”

“.......”

 

이제 와서 확신이라는 말은 우습지만, 그가 보통의 모든 남자에게 이렇게 대하진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11

 

술 한 잔 못 사줘요? 일부러 뽑아준 건 아니더라도. 술 한 잔 사줄 순 있잖아요. 돈도 많으면서.”

 

데려다줄게. 주차장으로 나오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렇게 말하던 백현에게 술을 사달라고 하자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였다. 아님 됐어요. 나두 차 갖고 왔는데. 같이 갈 것도 아닌데 그럼 뭣하러 데려다줘요? 내 차는 어떡하라고. 투정하는 투를 쓰자 순순히 제 차가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비싼 술 먹을래요. 위스키.”

 

잘 아는 바로 데려가줘요. 종인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가 키핑 해놓은 리스트 중 가장 비싸고 오래된 것을 골랐다. 잔뜩 약 올리듯 신이 난 애 같은 표정에 백현이 피식 웃는다.

 

발레가 주제인 영화를 봤어. 저번 주말에 시간이 좀 나길래.”

 

종인의 의문 어린 시선에는 조금 멋쩍어 하는 기색을 보였다. 발레는 잘 몰라, 하지만, 이라고 말하며 제 마음에 해일이 되던 남자.

 

관객이 너무 예의가 없었잖아. 기본은 알고 볼까 해서.”

 

그렇게 말하는 입술에 종인의 도톰한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멋있더라, 여자나 남자나 다.”

“........”

근데 니가 더,”

 

입술이 바싹 말랐다. 말의 텀이 생각보다 더 길었다. 얇은 입술을 달싹거리던 백현이 쥐고 있던 잔을 입에 단번에 꺾어 넣었다. 손바닥 안에 빈 잔을 굴린다.

 

잘하더라고.”

“.......”

 

다른 말이잖아. 나는 알아요.

 

 

 

진탕 취했다. 바닥이 눈앞으로 올라오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백현이 어느 정도로 취했는지는 잘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이 이리저리 휘청거렸어도, 제 눈앞에 그가 서있다는 사실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양쪽 다 썩 사정이 좋지는 않아보였는지 도와주겠다는 대리기사마저 성가신 듯 팁까지 줘 먼저 보낸 고집스런 남자가 피로한 얼굴로 저를 부축한 팔을 추스른다. 김종인, 비밀번호 뭐야.

 

그냥 데려다주지 마요.”

“.......”

그냥 가지 마요.”

“.......”

같이 있자.”

비밀번호.”

 

비밀번호 뭐냐고.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0114. 취하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그의 희고 긴 손가락 끝도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는데.

 

나 그렇게 매력 없어요?”

무슨 소리야.”

아님 찔러보고는 싶은데, 나 갖긴 싫고 남주긴 아까운 정돈가.”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침대 위에 던지듯 눕혀진 주제에 입이 계속 제멋대로 말을 했다.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친 백현이 양 커프스를 아무렇게나 접어 올렸다. 날씨에 맞지 않는 더위였다.

 

... 예쁜데.”

“.......”

열어보면 달라요. 그렇게 형편없지 않은데. 생각보다 더 괜찮은데.”

 

목을 조이던 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했다. 다른 건 됐고, 시원한 물이나 한 잔 마셨으면 싶었다. 잠이나 자. 이 쪽도 만만치 않게 마신 건 마찬가지였다. 컨디션이 별로였다. 데려올 땐 그대로 눕히기만 하면 정신을 놓을 상태인 것 같았는데, 어쩐지 맹랑한 말을 멈추지 않는다.

 

도망가지 말고 더 알아보면 다르다고요.”

“.......”

 

두통이 일었다. 내일은 숙취가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사위가 어두워 사이드테이블의 스탠드를 조심스레 눌러 켰다. 터치식이다. 지나치게 밝아 두어 번 더 두드렸더니 조도가 낮아졌다. 그리고 그대로 손목이 잡아 채였다. 술에 잔뜩 취한 녀석이라 악력이 무식했다. 놀랄 새도 없이 몸이 크게 기울었다. 긁어내리듯 대책 없이 잡아채는 통에 커프스에 달린 단추가 우악스럽게 떨어졌다. 도르르. 마룻바닥을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간신히 균형을 잡아 종인의 고개 옆에 손을 짚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주정뱅이보다야 나은 형편이지만 이 쪽도 이렇게 무식하게 잡아당겨지기엔 썩 상태가 좋지 않다. 팔 안에 가둔 채 내려다본 종인의 눈이 짙었다.

 

나 혼자 이러는 거..., 아니잖아요.”

“.......”

 

언제나처럼 그 시선이 종인의 눈과 입술을 집요하게 훑는다.  하지만 키스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너무 억울했다. 착각 아니잖아, 개자식아.  늘 그런 눈으로 벗길듯이 보면서. 잠이 쏟아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12

 

종인은 드디어 이사를 허락했다. 그간 이런 저런 핑계로 버티며 저를 애태웠지만, 어차피 쓰지 않는 집이나 마찬가지인지 오래였으니 당연한 수순 같은 거였다. 이번에도 별 기대를 않고 그 집, 처분하지? 하고 지나가듯 물었는데 의외로 쉽게 허락했다. 뜻밖의 수월한 반응에 기분이 좋아져 얼굴을 부여잡고 키스하자 간지러워어, 하며 늘이는 말끝이 사랑스러웠다. 다음 달 새로 공연을 시작하는 종인이 합동연습에 가 있는 동안 세훈이 대강 자잘한 짐만 챙겨오기로 했다. 종인은 경계심이 강한 듯 하면서 또 한편으로 물렀다. 연애를 하면서 얼마 되지 않아 쉽게도 현관문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또 이사는 안한다고 하고.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제가 이렇게나 빠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긴 휴식이 끝났다며 투덜대던 잠에 퉁퉁 부은 얼굴. 비식 웃음이 났다. 이것저것 들춰보며 하나씩 주워 담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사실 딱히 영양가 있는 일을 하러 온 건 아니었다. 어차피 물건욕심이 크게 없는 종인의 집엔 살림이 많지 않고, 대부분의 것은 이삿짐센터에 맡기면 알아서 할 것이다. 세훈이 집어드는 건 대체로 종인의 액자라던지 옛날 영상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개인 소지품 같은 사소한 거였다.

 

“......?”

 

슬리퍼를 신은 발끝에 뭔가가 채였다. 슬리퍼 탓에 감촉은 느끼지 못했지만 어딘가에 부딪쳐 튕기며 탁, 하는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휘 둘러보자 이내 발치로 다시 굴러온다. 단추. 허리를 굽혀 주워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물건이었다. 손가락 사이에 두고 한번 둘러 천천히 살폈다. 종인은, 셔츠를 입지 않는다. 셔츠를 입으면 기가 막히게 어울릴 드레시한 몸매를 가지고도 불편하다며 싫어해서 늘 아쉬워했던 쪽은 세훈이었다. 그 셔츠, 꼭 사주고 싶은데. 하고 말해도 그럼 다른 거 사줘, 하며 마음에도 없는 물건을 집곤 했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입지 않아서, 셔츠가 가득한 제 옷장과는 퍽 구성이 달랐다. 단추가 있는 옷은 거의 없는데. 기시감에 등줄기가 잠시 서늘해졌지만 이내 지워냈다. 물론 드레스룸을 열어 종인의 몇 벌 안 되는 셔츠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찜찜한 건 단지 기분 탓이다. 분명 종인의 옷장을 열면 단추가 떨어져나간 셔츠가 아무렇게나 걸려있을 테니까. 출처가 불분명한 의심을 하고 싶지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뭐가 됐든, 아직은.

 

문득 먼지가 앉은 거실 탁자 위 덩그러니 놓인 화병이 눈에 들어왔다. 색이 바랜 프리지어. 종인이 그렇게 정성스레 다듬고 물을 채워 담았던 꽃은 어느 새 시들어 노란 꽃잎이 바짝 말라있다. 그 때 답지 않게 의미를 두는 것 같긴 했지만 본래 종인이 이런 걸 지속적으로 관리할 만한 주변머리도 아니다. 이런저런 일정과 공연 준비로 정신없이 보내고, 자신의 집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연히 잊혀졌을 법 했다. 차가운 물에 손이 젖어 제 노동으로 꽃을 만지는 종인이 못 견디게 예뻐서 그 날 몇 번이고 안았다. 매번은 아닌 한계까지 몰아붙여 울먹이게 하면 파르르 떨며 안겨오는 손끝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세훈은 말라비틀어진 꽃뭉치를 집어 든 것 하나 없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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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이란 이름으로


매리엇




5

 

오랜만에 외식할까. 저녁 여덟시쯤 종인의 집으로 퇴근한 백현이 물었다. 현관문을 열었는데 들어오지 않고 문턱에 기대서 있었다. 안 들어오고 뭐해? 의아한 눈으로 묻자 나가자. 말했다. 일정하진 않지만 백현이 그렇게 권유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주기가 있다. 일정 기간 이상 집에만 있게 두지 않을 것.

 

하얀 국물에 담군 샤브샤브를 먹고 나오는 길에는 뱃속이 따뜻했다. 뜨거운 거 먹었으니까 시원한 것도 먹어야지. 하며 입에 아이스크림을 푹 물려준다. 사실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지만. 아이스크림을 돌돌 녹여먹으며 주차해 놓은 데까지 걷는 길에는 백현이 사진 얘기를 했다. 가을에 아마추어 사진전 한다던데, 나도 하나 낼까? 어떻게 생각해. 제 의견을 묻는 말에 종인은 끄트머리가 녹아 동그랗게 된 아이스크림을 깨물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사진 그만뒀다구 하지 않았어?”

... 너만큼은 아니고. 하긴 하는데.”

 

무심히 하는 말에 그만 입이 벌어졌다. 종인은 졸업을 하고도 꽤나 열심히 취미를 유지한 편이었다. 도훈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건지도 몰랐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에는 사진을 직접 인화하려고 만든 암실이 있었다. 단독으로 서재가 없는 대신이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방음벽을 설치하고라도 작업실을 만드는 것처럼, 서재를 희생하면서 제일 공들여 만든 방이었다. 그 네모진 공간 안에 모든 추억이 다 갇혀있다. 하지만 백현은 정말로 다 그만둬 버린 줄 알았는데. 기뻤다. 아직 그 때의 우리를 만든 공통분모를 백현이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활짝 웃었나보다. 백현이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참나.”

“......?”

그렇게 웃고.”

 

사이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이렇게 백현과 분위기가 자연스레 좋을 때면 종인은 걱정이 됐다. 거절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될 것 같아서. 백현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혹시 정말 실망하지 않을지도 다 걱정이 돼서. 그런 생각에 멍하니 보고 있자 눈앞으로 훅 쳐들어온 손이 딱밤을 먹인다.

 

가자.”

“.......”

 

벌써 잊으면, 안 될 것 같다.

 

늘상 그런 습관처럼 바지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앞서 걷는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가 원래부터 다정한 성격이란 건, 그거야말로 제 편의적인 생각일까.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사랑이 아니라면,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도.

 

 

 

 

 

종인은 원래부터 혼자 자지 못하거나, 어둠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두컴컴한 집에 혼자 들어가기를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언젠가부터는 늘 바로 현관문 앞까지 바래다주는 것이 데려다준다는 것의 정의였다.

 

현관문 앞에 나란히 선 백현이 문 쪽으로 턱짓을 한다.

 

“...그냥 가게?”

. 적당히 들어가려고. 아침에 일찍 나가야 되기도 하고.”

들어왔다 가.”

 

어리광 아닌 어리광에 백현이 피식 웃는다. 그가 곤란할 때 짓는 웃음. 벌써 자정이 넘었다. 사방이 고요하고 모두가 잠든 시간. 이 조용하고 말썽 없는 동네엔 몇몇의 열정만이 깨어있겠지.

 

자신 없는데.”

“........”

오늘은.”

 

무슨 자신? 하고 물어서도 안 된다는 걸.

 

간다.”

 

얼른 백현의 옷깃을 붙잡았다. 급한 맘에 일단 잡긴 잡았는데, 자신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뻔히 알아들었으면서 못 알은 체 하긴 면목이 없어서. 핑계가 없어서, 꾹 붙잡고 아무 말을 못하니 백현이 못 이기고 그만 소리 내 웃어버린다. 웃음소리가 시원하다.

 

진짜 너무하네- 김종인. 나보고 잠만 재우고 가라는 거지?”

“.......”

그래. 들어가자.”

 

하고 먼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연다.

 

 

 

 

 

잠에서 문득 깨었을 때, 백현은 제 배와 가슴 바로 옆 어디쯤에 어중간하게 엎드려 잠들어있었다. 종인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어쩐지. 잠자리가 영 사납더라니. 그리고 어둠속에서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팔을 괴고 엎드려 새우잠에 든 얼굴을. ‘자고 가.’라고 말했으면. 그가 다르게 받아들였을까.

 

조금 지켜보다 조심조심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앞으로 흘러내려 눈을 가린 앞머리를 쓸어 넘긴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짧은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조심해서 한다고 했는데, 너무 여러 번 만졌나보다. 백현이 부스스 눈을 뜬다. 너무 가깝다. ... 하고 부르기도 전에 입술이 집어 먹혔다. 입속으로 혀가 들어온다. 숨이 뜨거웠다. 키스하며 제 위로 올라온다. 티셔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손에 자연스레 허리가 들렸다. 옷 위로 아래가 맞붙는다. 가운데가 뜨거웠다. 온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백현이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혀엉.... 그가 입은 셔츠의 가슴팍을 꼭 쥐자 소리가 안으로 삼켜질 만큼 키스했다. 맨 허리를 간지럽히는 손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망울진 눈으로 올려다보자, 마주 내려다보는 눈이 다정하고 뜨거웠다. 그리고 천천히 내려가는 입술, . 제 호흡을 달뜨게 하기 시작한다. , 안 돼. 정말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갑자기 설움이 복받쳤다. 막연한 두려움이 종인을 거대하게 짓눌렀다.

 

백현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었더라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테다. 문이 닫힌다. 무거운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종인 혼자 남았다. 잠드는 그 때까지가 가장 무섭다는 거, 놓지 않아주겠다고 말했으면서.

 

 

 

 

 

6

 

오랜만에 왔다 형. 답장도 느리게 하구.”

 

사들고 온 걸 식탁위에 풀어놓던 백현이 힐끔 눈을 마주치며 멋쩍게 웃는다.

 

그러게. 바빴어. 밥은. 먹었어?”

먹었을 리가 없잖아....”

 

정말 어린애처럼 굴기 싫은데.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왔다. 입이 이만큼 쭉.

 

앨범 녹음 저번에 마지막 곡 했다며. 이제 마무리 단곈 줄 알았는데... 계속 바쁘네.”

... 저번에 걔들 말고. 그것도 있는데, 다른 그룹. 거기 센터 하는 애를 이번에 솔로를 내보내라고 해서. 요즘 정신이 너무 없다.”

나 내일 강릉 가려고 하는데....”

 

백현의 손이 잠시 멈추고 반사적으로 묻는다.

 

... ?”

“.......”

“.......”

도훈이형 생일이잖아.”

.”

기억 못 한 거지.”

 

이 서운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체 뭐라고 이름 붙여야할까. 안 그러려고 해도, 벌써 속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시간... 안 되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백현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짚는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종인아. 진짜 미안한데, 내가 생각을 못했어. 주말에 가자. 시간 비워놓을게.”

아냐. 나 혼자라도 갔다 올래.”

“...너 운전도 못하잖아.”

버스타고 가지 뭐. 아님 운전 해봐도 되구.”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고집 부리지 말고. 토요일에 데려다줄 테니까 그 때 가. 하루 이틀 늦는다고,”

고작 두 번째 생일인데 벌써 잊어버렸다고 하면 너무하잖아. 나였으면 서운할 거 같아. 나는 당일에 갈게.”

 

그가 한숨을 쉰다. 한숨 쉬는 소릴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서운함이 몇 겹이 겹친다. 백현은, 제가 말도 안 되는 뗑깡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종인도 그쯤은 다 안다.

 

아무리 그런 거 아니라고 해도 형은 나랑 다르잖아. 나 이해 못하잖아.”

그래.”

“.......”

이해 못 해. 이해 못하겠어.”

 

하지만 그가 그렇게 냉정하게 긍정해버릴 줄은 몰랐으니까.

 

김도훈 문제만 나오면 내가 어디까지 너한테 잘못한 사람인 건지 이젠 알지도 못하겠어.”

“.......”

나라고 걔가 죽길 바란 거 아냐. 꿈도 꿔본 적 없어.”

“.......”

그냥 내 감정이야. 너 좋아했고, 그거랑 상관없이 김도훈이 죽었고. 근데 난,”

 

종인은 여전히 죽는다는 말만으로도 불안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고작 그 정도였다. 갈피를 못 잡겠다. 이렇게 냉담한 백현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른다.

 

여전히 좋아해. 그게 다야.”

“.......”

너도 여전히 김도훈의 애인이겠지.”

 

다음 말을 봐주지 않을 것 같은 직설적인 시선도.

 

항상 생각해. 그 때 내가 먼저 고백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후회해?”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나왔다. 이미 터져버린 감정을 어쩔 줄 몰라서. 백현은 후회하고 있다.서러웠다. 그런 감정은 논리적이지 않다. 언제는 기다린다면서. 기다릴 수 있다면서. 원망할 자격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원망했다.

 

, 후회해. 처음부터 내가 사귈 걸. 김도훈한테 기회도 주지 말 걸.”

“.......”

그딴 의리가 뭐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어떻게 죽었는데! 얼마나,”

 

얼마나 비참하고, 허망하게. 종인은 백현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빨개지기 시작한 눈이 아팠다. 눈알이 뜨겁다. 마주본 백현의 얼굴이 너무 아프게 일그러져 있어서,

 

나한테도 조금은, 너그러워져봐. 너는 항상 나한테만 그렇게 엄격하고 잔인하지.”

 

결국 먼저 눈물이 터졌다. 그러지 않으면 백현이 울어버릴까봐 두려워서 먼저 울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지쳤다고 말하고 있는 얼굴이 미웠다. 그렇게 좋은 남자인 척, 너그러운 사람인 척 사람 맘 다 흔들어놓고. 기대하게 했으면서. 떨어지는 눈물에 백현이 말을 멈춘다. 입을 꾹 다물고 매끈한 목울대가 몇 번이나 말없이 일렁거렸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럴 때가 있다. 잔인한 상대 앞에서 너의 잔인함을 원망하기보다 내가 너를 사랑한 방식이 잘못됐었나 하고 후회하게 될 때.

 

많이 울겠지. 처음으로 한 번만, 모른 척 하고 싶다.

 

 

 

 

 

7

 

결국 도훈에겐 가지 못했다. 종인은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도훈의 사인이 교통사고였기 때문에, 그 이후로 처박아둔 차에 기어이 앉아도 봤지만 영락없이 실패였다. 운전도 못 하겠고, 백현과 싸우고는 펑펑 우느라 체력이 다 소진돼서 그럴 힘도 없었다. 늘 그가 바래다줬지만, 옆에라도 앉아있었다면 좀 용기를 낼 수도 있었을텐데. 언제부터 이렇게 백현 없인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됐지. 심지어 자각도 크게 없었다는 사실이 더 황당했다. 아니다. 그냥, 백현 없이 혼자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마주한 백현은 건조한 얼굴이었다. 원래 그가 가진 얼굴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종인 자신은 잘 보지 못한 그 얼굴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

“.......”

진짜 화났구나.”

 

그렇게 묻자 선선히 머리를 쓰다듬는다. 안심해도 되는 걸까.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니 덧붙인다.

 

너한테 화내는 거 아냐. 그냥 죽은 사람한테 질투나 하고 있는 거 한심하니까. 그래서 그러는 거지.”

“........”

그만 하자, 종인아. 너도 할 만큼 했어.”

 

힘든 거 알면서 계속 밀어붙여서, 진짜 미안해. 하고 사과하며 한 번 더 머리를 아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가슴에 쿵 바위라도 떨어뜨린 것 같다. 역시 안심하면 안 됐었다. 그의 건조한 얼굴은 잘못 본 것이 아니라, 그가 드디어 지쳤기 때문이었고. 미안하다는 말을, 그가 결국 먼저 한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또 같은 패턴.

 

 

 

 

 

8

 

종인은 세훈과는 과 동기다. 같은 사진부 멤버이자, 유일한 같은 과 동기. 1학년 1학기에 입부한 종인보다 꼭 한 학기 늦게 들어왔다. 종인은 주로 백현, 도훈과 사진부 활동에 더 비중을 뒀기 때문에 과 동기 중에 이때까지 주기적으로 얼굴을 보는 건 거의 세훈 정도가 유일했다. 세훈은 별로 관심 안 둔다는 듯 시니컬하게 말하곤 하는 것에 비해 이모저모 충실한 편이라 저 말고도 과에 만나는 사람이 아직도 꽤나 있는 것 같다. 그러느라 내내 붙어 다닌 정도는 아니지만 종인의 학창시절, 사진부 기억을 구성하는 핵심멤버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제법 편해서 그래도 자주 봤었는데, 이번은 꽤 오랜만이다. 암묵적으로라면 몰라도 도훈과 연인 사이였다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요즘 백현이형이랑은 잘 지내?”

....”

잘 좀 지내. 대체 언제 받아주려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세훈이 툭 던져놓듯이 말한다. 종인은 제 음료를 마시다 말고 깜짝 놀라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 , 알고 있었어?”

우리 그때 멤버 중에 백현이형이 너 좋아한 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렇게 티 나게 멀어졌는데. ... 눈치 없는 사람들은 잘 몰랐을 수도 있으려나.”

 

세훈은 표정변화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별로 자세히 말하진 않았어도 세훈은 돌아가는 사정을 대강은 다 아는 눈치였다. 예전에도, 지금도. 물론 백현과도 계속 왕래를 하는 사이인 것도 있겠지만. 하지만 언제 저렇게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갖게 됐지. 그러고 보면 어느 틈에 저렇게 사약 같이 진한 아메리카노가 익숙하게 잘 어울리는 남자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틀 안에 갇혀서, 자라지 않겠다고 고집을 쓰고 있는 건 저 혼자일까. 저도 모르게 머그컵 위를 빙빙 손으로 매만졌다.

 

어차피 다 늦은 얘기긴 한데. 도훈이형도 그렇게 되고. ...난 솔직히 니가 도훈이형이랑 사귄다고 했을 때 좀 놀랐다.”

“.......”

어차피 니가 남자한테 관심이 있을 때 얘기였지만. 사귀어도 백현이형이랑 사귈 줄 알았는데.”

 

도훈도 다 알고 그랬던 건 아닐까. 모른 척 했던 건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정말 백현이 먼저 제게 말했다면.

 

정말 제가 백현을 그렇게나 소모시켰던 걸까.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만조금만 하면서 더 응석을 부리던 것이 백현은 물론이고, 저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밀어낼 줄 몰랐다. 백현이 다 소모되어 사라진다면, 아니 그의 다정이 다른 사람을 향하게 된다면. 그런 상상을 하고 초조해졌다. 안 돼. 그의 다정이 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느니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런 감정이었다. 종인이 그에게 가진 것. 욕심은.

 

 

 

 

 

9

 

앞에서 만난 다른 직원의 말로는 아직 녹음작업 중이라고 해서 살짝 조심해서 안을 들여다봤다. 저도 모르게 발끝을 들고 안을 살폈을 땐, 다행히 녹음중은 아니었고 가수가 백현 옆으로 나와 있었다. 저번의 그, 거의 울 것 같았던 여자 아이돌이다. 종인도 잘은 모르지만 백현네 회사 아이돌이라 대충은 안다. 회사에서 제일 잘 나가는, 밀어주는 여자 아이돌 그룹의 센터인 멤버. 언뜻 봐도 정말 예쁘다. 눈이 바비인형 같이 크고, 틴트를 진하게 바른 입술이 앵두처럼 새빨갛다.

오빠 나랑 잘래요?”

 

잠시 들어가서 아는 척이나 하려던 종인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펄쩍 놀라 그만 그 자리에 섰다. 기겁할 노릇이었다. 정말 저런 대사를 듣게 되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었고, 그 다음으로 굳이 보지 않아도 살벌한 백현의 목소리가 들린다. 윤주희.

 

너 맞을래?”

 

말투가 까칠하다. 어쨌건 이십대 초반부터 그간의 백현을 알아온 경험으로, 저건 정말 아주 화났을 때만 나오는 소린데.

 

너 누가 그렇게 싸가지 없는 말 하라고 가르쳤냐.”

“.......”

너 어른한테 나랑 잘래요 소리가 나와?”

오빠....”

그런 소리할 거면 앞으로 선생님이라고 불러. 오빠 소리 하지 말고.”

 

비쩍 마른 여자애가 옆에 잔뜩 몸에 힘이 들어가 주먹을 꾹 말아 쥐고 서있는데도 아는 척도 안 한다. 콧잔등에 흘러내린 테가 얇은 작업용 안경을 습관적으로 한 번 밀어올리곤, 악보에 시선을 박고 제 할 말만 한다. 물론 만약 이런 상황이 왔을 때 백현이 상대도 안 해줄 쪽일 거란 생각은 했지만, 저 정도로 무시를 할 줄은 몰랐다.

 

주희. 그런 생각으로 녹음실 따로 나오는 거면, 다음부턴 나머지 애들이랑 같이 와라.”

... 줘도 못 먹어요? 나 국민 여동생 소리 듣는 거 몰라요? 나랑 자고 싶어서 달려드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저번에 다른 프로듀서님이랑 작곡가 오빠는 나 존나 이쁘다고 나랑 자보고 싶댔거든요? 근데 내가 튕겼는데 씨...”

어떤 새끼니. 도대체.”

 

험악한 투로 일갈한다. 그가 보고 있던 걸 그대로 덮어버리곤 여자앨 그제야 돌아다본다. 최근에 저런 상태가 많이 되어봐서 아는데, 복받쳐서 딱 한 번만 더 찌르면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상태다.

 

오빠는 내가 알아서 주겠다는데... 내가 딴사람 아니구 오빠랑 자겠다는데 근데도...”

오빠 아니고 선생님.”

 

너무해. 으아앙. 아무리 되바라진 소리를 당돌하게 해도 어린애는 어린애고, 아마 거절 같은 건 당해본 적이 없을 여자애가 인형 같은 눈으로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런데도 백현은 눈 하나 깜짝 안한다.

 

그러니까, 내가 널 데리고 자면 어떻게 되겠냐. ? 너 몇 살이야. 열일곱이지. 니 입으로 니가 국민 여동생이라며. 내가 국민 여동생을 건드리면 어떡해? 못하는 소리가 없다.”

 

눈물을 참을 생각도 않고 보란 듯이 뚝뚝뚝뚝 흘려버리는 여자애를 보고는 한숨을 쉰 백현이 그제야 선심 쓰듯 말했다.

 

더 크면 와. 그 때도 나 좋으면 생각해볼게.”

 

그리고 그 말에는, 듣고 있던 종인이 어이가 없었다. 솔직히 기분이 좀 상할 뻔 했지만, 한두 번 당해보고 한두 번 거절해본 것도 아닌 솜씨라 그러려니 하려고 했는데 저런 말을 하고.

 

앞뒤 없이 막 덤비지 말고.”

약속했어요. 나 그때 진짜 다시 고백한다. 안 받아주기 없어요. 진짜 말 바꾸면 남자도 아니다.”

그 때 가서 무슨 아이돌오빠 소개해달라고 징징대지나 않으면.”

 

어이구. 백현이 아저씨 같은 투를 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 세우기도 포기했는지 금세 기분이 풀린 여자애가 코끝은 빨개진 채로 반색을 하며 달싹 붙는다. 하긴, 저번에 변백현한테 그렇게 호되게 당하는 걸 봤는데 고백씩이나 하고 있는 것만 봐도 견적은 나오지만.

 

오빠.”

선생님이랬다. 너 발랑 까진 소리 한 벌이야.”

오빠아.”

그래, 알았으니까.”

 

어느 새 백현의 말투가 누그러져 있다. 와 진짜. 생각해보긴 뭘 생각해 봐?

 

 

 

 

 

좋냐.”

 

종인이 녹음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부루퉁한 투로 시비부터 거는데도 캐치를 못하고 멀건 얼굴로 돌아본다.

 

언제 왔어?”

 

종인에게 아는 체를 하며 안경을 벗어 내려놨다. 금테 안경. 이상하게 안경을 쓰면 더 늙어보이지가 않고 오히려 더 인상이 선명하고 날카롭고 그래 보인다. 요즘 살이 더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어린 여자애들이 오빠 오빠하구. 형은 직장 동료가 다 그런 애들이라 좋겠다.”

아아... 무슨.”

 

하고 피식 웃는다.

 

다 봤거든요. 튕기면서 엄하고 멋진 선생님인 척도 해보구. 입 찢어지겠던데 뭐.”

 

원래대로라면 질투해? 하면서 깐족거려올 때도 됐는데, 백현은 그냥 웃는 둥 마는 둥 하고 만다.

 

나 포기하지 마. .”

 

종인은 늘 백현을 마주할 때마다 두려웠다. 항상 조금 느슨해지려다가도 방심하고 있으면 가슴을 콱 틀어막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이 막연하고 바닥이 없는 두려움의 정체를 안다.

 

“.......”

다른 사람 좋아하지 마.”

 

그를, 잊게 될까봐.

 

외롭단 말이야. 나 형이 필요해.”

 

제가 온전히 행복해져 버릴까봐, 그게 두려웠다.

 

마치 아까 백현의 앞에서 호기롭게 당돌한 말이나 던져놓고는 실은 잔뜩 얼어 서있었던 그 애처럼, 종인은 꼭 그 애의 처지가 되어 여기 서있다. 담담한 표정이나 입으며 적당히 대하던 백현이 물끄러미 저를 돌아본다. 제 얼굴 표정을 찬찬히 읽어내는 눈.

 

키스 정도는... 해도 되는 게 아닐까. 종인은 눈을 꾹 감고 부딪쳤다. 의자에 앉아있던 백현이 약간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무게를 받아내는 손의 모양이 엉거주춤하다. 이내 벌어지는 입술을 열고 들어가 입안에 마치 단 꿀이라도 고인 것처럼 입술과 혀를 빨았다. 입술이 잠시 떨어지자 숨을 내쉬는 서로의 입술이 반들반들했다. 이렇게 나만 생각하게 될까봐. 형이, 옆에 있으면. 숨을 고르는 백현과 눈이 마주쳤다.

 

....”

“...진짜 못된 새끼야 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 뒤통수를 다시 세게 당겨온다. 그렇게 녹음실 안에서 한참동안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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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이란 이름으로


매리엇

 

 

 

0

 

역시 그 때가 가장 좋았다. 지금도 여전히 종인은 꿈을 꿨다. 그와, 자신과, 백현이 있는 꿈을. 꿈은 이상할 정도로 늘 그가 혼자 자신을 찾아오거나, 세 사람이 함께이거나였다. 그가 혼자서 저를 찾아오는 꿈을 꿀 때면 늘 등을 보이고 멀어지는 그를 붙잡으려다 울며 깨는 것이 다반사였다. 셋이 함께 있을 때면 그 때의 그 연노란색 캠퍼스였다. 그가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웃고 있고, 백현은 익살스런 표정이었다. 종인은 가운데 아빠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래서 종인은 늘 잠이 들기 전, 그와 자신과 백현이 있는 꿈을 꾸길 빌었다.

 

도훈이가, 죽었대.’

 

백현의 목소리가 잔뜩 잠겨있었다. 눈가가 퀭하고 얼굴이 버석했다. 우습게도 도훈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고 전한 것은 제가 아니라 백현 쪽이었다. 만일 반대로 제가 먼저 알아서 백현에게 전해야만 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백현은 어떤 표정을 했을까. 종인은 지금도 가끔 그 반대를 상상했다.

 

회사 앞 사거리에서... 교통사고였대.’

 

그대로 안에서 뭔가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 종인은 악을 지르며 매달렸다. ‘어떻게 그렇게 덤덤하게 전할 수가 있어? 어떻게 그래!’ 울며불며 소리를 질렀다. 백현은 제가 무게를 싣는 대로, 밀치는 대로 그대로 밀려났다. 그 때의 제가 포악했다고, 종인은 인정한다. 백현의 잘못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알면서 그랬다. 그만큼 그가 아니고서는 그 감정을 나눠줄 이도, 받아줄 만큼 좋은 이도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런 거였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죽었다고 말할 수 있어!’ 살려내라고도 말했던 것 같다.그러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백현은 무너지는 저를 잡지도 못한 채 그저 속수무책으로 받아내기만 했다. ‘왜 형은, 울지 않는 거야?’ 나만큼 슬프지 않지, 라는 듯이 몰아세운 셈이었고 그 감정에 빠져 한동안 허우적거렸다. 여전히 사과는 하지 못했다. 아직은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처음은 늘 셋이 함께였다. 관계의 출발선은 엇비슷했다. 종인이 갓 대학 신입생이었던 4, 쭈뼛대며 기웃거리던 사진부의 동아리방 앞에서 만났다. 소위말해 그렇게 핫한써클은 아니었다. 언제든 마니아는 있을 법 했지만 신입생에게 인기를 얻기에는 지나치게 정적인 취미였다. 몇 명의 핵심 멤버 위주로 돌아가는 동아리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종인은 금세 적응하고 녹아들었고, 도훈과 백현은 그 중 큰 부분이었다. 둘은 고등학교 때부터의 절친한 친구였고, 본가가 같은 동네에 있었다. 그 두 단짝친구의 조합에 종인이 자연스럽게 끼어 어느 샌가 셋이 됐다. 늘상 붙어다녔다. 모든 걸 함께 했다. 종인은 제 과의 친구들보다도 둘과 붙어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몇 살 터울이 나는 선배들과 다니니 빠르게 애늙은이가 되어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 과 생활에 소홀해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 테두리가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렇게 대학교 1학년의 여름을 보내고 가을과 겨울이 차례로 지났다.

 

변화가 일어난 건 백현이 사진부 활동에 소홀해지면서였다. 백현은 사진을 꽤 좋아했고, 제법 감각이 있었지만 원래 그의 전공은 음악 쪽이었고 졸업이 가까워지며 제 전공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졸업을 준비하는 건 도훈이형도 마찬가진데. 처음엔 서운해 입이 나왔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빠져나가버린 자리에 뻥 뚫린 듯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함께하면 재밌었는데. 의리 없게. 가끔 얼굴을 볼 때면 드러내놓고 툴툴 대도 백현은 웃기나 했다. 그제껏 한 번도 서로 싸운 적이 없었다. 도훈과 백현이야 이미 친하다 못해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놀랄 정도로 종인에게도 마치 울타리처럼 아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늘 셋이 함께 하던 장면에 언젠가부터 한 번, 두 번 백현이 빠지게 되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다보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소식에 전보다 느려졌고, 시시콜콜한 것까지는 모르게 되었다. 그 즈음 도훈과 첫 키스를 했다. 잘 쓰이지 않아 자신들과 백현의 아지트로 삼았던 사진부 맞은 편 강의실에서였다.

 

 

 

 

 

1

 

햇수로 세어보니 무려 7년을 만났다. 함께 보낸 계절들을, 한 두어 번쯤 더 보내면 잊어질까. 멍하니 티비를 보다가도, 버스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있다가도 눈물이 났었던 걸 생각하면 벌써 1년 정도를 보낸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그러고 보면 꿈에 나오는 횟수도 처음보다는 훨씬 줄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꿈에 나왔었다. 늘 베개가 축축한 채로 잠에서 깼다. 산 사람은 살아지게 된다는 게 이런 거라면 참으로 허탈했다.

 

밥 먹었어?”

아니.”

 

백현은 이미 앞치마를 두르며 묻는다.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걸 아니까. 백현은 일주일에 서너번 쯤 이집으로 퇴근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같이 살지 않는다. 그가 이 집에서 잠을 자지도. 도훈이 죽은 후로, 생활이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집은 여전히 그와 함께 살던 그대로다. 이사를 가려했지만, 이사를 가야만 하는 이유만큼이나 갈 수 없는 이유가 너무 많아서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아 더 엉망이었다. 거의 대부분을 그 공간에서 보내면서 일상을 놓아버렸다. 비밀번호를 훤히 아는 백현은 제 알아서 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것저것 발로 밀며 들어오고, 주로 하는 질문은 밥 먹었느냐는 물음이었다. 백현도 원래부터 요리 솜씨가 썩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근래 1년간 반복하다보니 요새는 실력이 느는 게 제법 눈에 띄었다. 아마도 백현이 있기 때문에 제가 더 엉망인 채로 놓아두고 있는 게 아닐까 문제점을 인식했지만, 달리 새로운 변곡점을 둘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서 내버려두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정말 크게 잘못된 건지도 모른다.

먹자.”

오늘 뭔데?”

김치볶음밥.”

 

자리에 털레털레 가 앉자 숟가락을 쥐어준다. 백현은 입이 짧은 편이다. 앞치마를 두른 채로 그대로 맞은편에 앉아 종인이 먹는 동안 있다. 안부는 보통 백현이 먼저 묻지만, 대화의 물꼬는 보통 종인이 텄다.

 

오늘은 회사 일찍 끝났어?”

.”

형네 회사 그, 걸 그룹 컴백한다며. , 누구지. 핑크...”

핑크부케.”

아 맞다. 신곡 나오구 그러면 바쁜 거 아냐? 인기 많은 애들이잖아.”

, 내일 타이틀 녹음할 거야. 애들이 새벽밖에 시간이 안 돼서 못 와. 먼저 자.”

.”

 

김치볶음밥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밀어 넣으며 종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이제는 꽤 익숙하지만 백현이 이 집에 앉아있는 건 처음엔 상당히 어색한 풍경이었다. 이렇게 당연하게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말하는 게 우스울 정도로. 도훈이 죽기 전 백현이 이 집에 왔던 횟수는 다섯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백현과 예전보다 어울리는 시간이 줄었다곤 하지만 달리 싸운 것도 아니었고, 여전히 다른 사람들보다는 가까운 사이였다. 당연하게도. 도훈과 백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짝이었고 꾸준히 연락은 되고 있었다. 백현과 도훈이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주기적으로 생존신고 정도는 하는 사이였고, 학교를 다닐 때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셋이서 모였다. 백현과 도훈은 따로 얼굴을 보기도 하는 것 같았다. 종인과는 둘이서만 따로 만나진 않았다. 처음에는 말이 오갔지만 몇 번 이래저래 약속이 흐지부지 되다보니 다시 말붙이기가 애매해졌다. 친분을 생각하면 좀 뜸해졌다고 사이가 뜨고 그것 밖에 안 되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보니 백현의 근황은 주로 도훈을 통해 듣게 됐다. 서운했지만 종인 쪽에서 먼저 밀어붙일 정도는 아니었고, 백현도 노력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사이. 어느 새 도훈이 없이는 연결고리가 없으면서, 같이 모이면 아무렇지 않은 체 옛날의 사이인 척 유쾌하게 지냈다. 그 정도였다. 도훈이 죽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계속 그 정도에 머물러 있었을 거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좋았던 추억만을 미련하게 붙잡아 가까운 사이인양.

 

백현이 이렇게나 출근도장을 찍게 된 건, 도훈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뒤에 종인이 짧게 병원 신세를 졌던 게 결정적이었다. 병명이야 뻔했다. 과로와 쇼크, 위경련. 그런 정신성의. 그 후로 백현이 저를 이렇게 살뜰히 챙겼다. 어떨 때 보면 바보 같을 정도로 헌신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끔은 누구에겐지 모를 화가 난다.

 

어머니. 저 있잖아요. 백현이 있잖아요.’

 

그 때, 백현은 망연자실한 가족들을 대신해서 상주 노릇을 했다. 일일이 손님을 받으며 동분서주 뛰어다니고, 또 제일 앞에서 상여를 멘 남자였다. 종인은 그 때, 백현이 참 신기한 사람이다 싶었다. 저는 이렇게 온몸에 힘이 빠지고, 무기력한데 어떻게 밥도 먹지 않고 저렇게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일까. 꼭 기계처럼. 하관을 마치고 백현은 그의 어머니를 장지에서부터 집까지 모셔다드린다고 자처했다. 꽉 막힌 차안에서 어머니는 내내 울었다. 종인은 일전에 그의 어머니와 일면식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다만 굉장히 가깝게 지내던 후배라는 백현의 소개에,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우는 걸 보고 그녀가 연민과 동질감이 어린 손길로 한 번 머리를 쓰다듬었던 게 다다. 어머니를 내려드리고 돌아가던 길. 그제야 울음이 터진 저를 보고 백현은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백현은 위로가 서툰 남자였다. 종인아, 하고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부르다 올라오는 내내 흐느끼는 소리를 가만 듣고 있던 게 다였다.

 

몇 달? 아니 근 2년 만에 처음 발을 들인 집에 그렇게 탈력한 종인을 데려다 눕혔다. 백현은 정말로 둘이 동거하기 시작한 이후 이상할 정도로 이 집에 잘 오지 않았다. 그는 종인을 침대에 내려놓고 황량해진 집을 한 번 휘 둘러봤다. 잘 수 있겠어? 여기 스탠드 켜놓고 갈게. 전화하고. 돌아서는 손목을 잡았다. 목소리가 쉬어 나왔다.

 

소주 한 잔 하고 가. 이 집에 혼자 못 있겠어.’

 

냉장고를 들여다본 백현은 그 길로 나가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왔다. 빈 벽에 등을 대고 나란히 앉아 소주를 따랐다. 잔에 반쯤 따라주는 백현의 손에서 병을 빼앗으려다 그만 잔을 넘어뜨렸고 별 것도 아닌 것에 눈물이 다시 터져 그를 곤란하게 했다. 잘 위로할 줄도 모르는 사람인 걸 알면서 뭐가 그렇게 편하고 만만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짓게 했는지. 한참을 입만 벙긋대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어깨에 기댔고 그의 셔츠 어깨가 흠뻑 젖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 옷을 벗겼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침대로 올라가지도 않은 채 바닥에서 몸을 겹쳐 등허리가 배겼다. 한참을 무기력하게 아래에 누워 그의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올려다보다 올라갈래? 하는 물음에 그의 위로 올라가 앉았던 기억이 단편적으로 남아있다. 들썩이는 엉덩이와 허벅지를 연신 달래며 쓰다듬던 손의 느낌. 그 날은 비가 왔고 무척 습했다.

 

 

 

 

 

2

 

 

잊어버려. 나는 그럴 거니까 형도 잊어버려줘.’

 

그렇게 말했을 때 백현의 얼굴은.

 

실수였다. 혼란스러웠고 판단력이 흐릿했다. 뭐가 맞고 뭐가 틀리다는 기준조차 스스로 세우기 힘들었다. 그가 다른 기대를 갖고 있을까봐 두려웠다. 그 때 차마 부르지 못하고 입안에 맴돌던 이름을 백현도 모르진 않을 거였다. 늘 센스가 좋은 남자였고, 이번에도 다르진 않았을 거다. 정말로, 아무것도 줄 자신이 없었다.

 

난 실수 아닌데.’

 

한참을 있다가 백현이 한 말은 그거였다. 이런 말, 이런 타이밍에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니, 어쩌면 영원히 할 생각도 없었는데,

 

김도훈이 먼저 나한테 얘기하더라. 너 좋아한다고.’

‘.......’

 

도훈이, ‘먼저.’ 그 뒤에 삼켜진 무수한 이야기에 종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알기가 무서웠다.

 

그 때 강의실에서 둘이 키스하는 거, 봤어.’

 

백현은 못 본 척 했고, 나가서 그 이후로 다시는 아지트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 번도 다시 우리의 공간에 혼자서도 발을 들인 적 없다. 우리 사귀기로 했어. 중대발표라도 하듯 백현을 앉혀놓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을 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했던 그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데 편견이 없다고 말해주었던가. 어차피 김도훈은 김도훈이고, 너도 너고. 정말 아무 것도 걸릴 없는 사람처럼 웃으며 달라질 것 없다고 말해주었던가. 그래서 고마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점점 멀어지는 걸 잡을 수는 없었고. 그 모든 게 밀려들어왔다. 도대체 어떤 게 먼저라는 이야기고, 뭐가 어느 시점인 건지 시점이 뒤엉키기 시작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버거웠고, 이런 타이밍에, 아니 어쩌면 영원히 하기 적절하지 않았을 얘기라면 모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눈을 질끈 감고 잘라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위로해준 건 고마워. 근데, 몸으로 위로 받는 거. 정말 저질이잖아.’

 

그 잔인한 거절에. 종인은 그 때 처음으로 백현의 눈물을 봤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는 너무 바빴고 오히려 메말라있었다. 기계적으로 모든 복잡하고 무거운 일을 뚝딱 해냈다. 마음 놓고 울기엔 그의 어깨에 짐이 너무 많았다. 일부러 불을 켜지 않은 집. 그 어둠 속에서, 눈물로 흠뻑 젖은 핼쑥해진 뺨을 모른 척 했다. 종인으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지금도 아직 그 때 백현이 얼마나 얼룩진 눈을 했었는지 잊지 못한다. 자신도 위로받아야할 존재였다고. 그 말이 하고 싶었을까.

 

상처 준다는 걸 알면서도 상처를 줘야만 하는 때가 있다. 우리는 자각하지 못하고도 타인과 자신에게 무수한 상처를 남기며 살지만, 알고도 상처를 주기로 했을 때는 더욱 참담하다. 우린 안 돼.

 

 

 

 

3

 

백현은 이미 꺼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약간의 어색한 공백 후에 다시 종인의 앞에 나타난 백현은 물끄러미 쳐다만 보는 저를 보고 딴청을 부리듯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어차피 회수해갈 수 없잖아. 사실이고.’ 그 공백이 그리 길지도 않았다. 그 이후로, 백현과 종인 중 누구도 그 날 밤의 일을 직접적으로 입에 담진 않는다. 암묵적인 약속, 아니 불문율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앞에 붙어 숨 막히게 관계를 짓눌렀다. 백현은 숨길 생각이 없고, 종인은 그게 부담스럽다. 많은 말하지 못할 것들이 있지만 백현은 여전히, 그 언젠가부터. 자신을 좋아한다.

 

그 시점이 다 그 즈음이었다. 백현과 그런 일이 있고서, 여러 가지가 몰려든 탓인지 그만 탈이 났고, 기어이 병원 신세를 졌던 게. 백현은 일부러 찾지 않았다. 고집이기도 했고, 자존심이기도, 한편으로 양심이기도 했다. 염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엔 어떻게 알고 나타난 백현은 잔뜩 입맛이 쓴 표정이었다. ‘형 나 아파.’ 그 한마디면 하던 것도 내팽개치고 달려올 만큼 자존심도 없는 놈인 걸 알면서. 그 정도 아량도 못 베풀어주느냐고. 그가 말했다.

 

너 누워있는 동안 생각했어. 이번엔 미루지 않는다고.’

 

그렇게 그 전날 받은 상처를 잊어버린 것처럼. 정말 그 답지도 않게, 모르는 척 연기하는 얼굴을 입고서. 그렇게 벌써 1년이다.

 

종인은 오랜만에 판교에 있는 회사 사무실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다. 종인이 다니는 회사는 IT쪽이다. 종인은 그래픽 쪽을 맡고 있다. 연구개발이 많고 프로젝트 형태가 많은 회사는 업무 성격상 재택근무를 많이 허용했다. 잠이 많고 부지런 떨지를 못 하는 데다, 혼자 집중해서 일에 깊게 몰입하는 게 훨씬 능률적인 종인에겐 최고였다. 하루 종일 퍼져있고 싶은 날이 많은 근 1, 2년은 더 그랬고. 오래간만에 얼굴을 본 사장님과 몇몇 사무실에 나와 일하는 동료들도 반가웠고, 간만의 마실에 기분이 좋다. 사무실에서 나오는 길, 살살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이 얼굴을 두드린다. 돌아오면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백현의 회사에 들렀다. 약속은 따로 하지 않았고, 백현의 일은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편이지만 보통의 퇴근시간에 가까워져 그랬다. 그랬더니 역시나 한참 일하는 중이다. 종인은 굳이 방해하지 않고 문턱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백현의 일을 지켜봤다.

 

다시.”

 

백현은 아까부터 계속 저 상태다. 벌써 한 20분 째. 듣는 사람 가슴이 옴죽 붙을 냉랭한 목소리로 다시. 다시. 다시의 연속. 종인만 해도 벌써 한 열 번은 들은 것 같다. 녹음실 안에 있는 얼굴이 앳된 여자애는 잔뜩 울상이다. 금방이라도 한 번만 톡 건드리면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귀여운 얼굴인데, 아이돌인가. 웬만하면 방해하지 않고 기다리려 했는데, 백현의 미간에 세로줄이 선명하고 인상이 나빠 보일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는 게, 저가 온 줄 정말 까맣게 모르는 것 같아 인기척을 냈다. 좀 멈춰줘야 할 것 같기도 했고. 불쌍한 어린양을 위해서.

 

.”

 

갑자기 부르자 잠깐 어깨가 움찔한다. 백현이 휙 돌아본다.

 

“...? 언제 왔어?”

좀 전에. 마저 일 해. 나 좀 기다리면 되니까.”

 

한 발짝 작업실 안으로 더 들어오며 말을 하니 찝찝한 얼굴로 녹음실 안쪽을 돌아다본다. 안에 있는 쪽은 잔뜩 얼어있고. 잠시 생각하던 백현이 영 떨떠름하게 한숨을 한 번 폭 쉬고 말한다. 일할 때의 백현은 상대적으로 좀 예민하다.

 

아니다. 그 김에 잠깐 쉬지 뭐.”

그러던가. 좀 쉬게 해. 그렇게 몰아붙이면 될 것두 안 되겠다.”

 

그 말에는 백현도 대충 수긍하는 듯 했다. 녹음실 너머로 말을 전하며 마이크를 끈다.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와. 정신 못 차리지, 아주.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단 듯 포르르 뛰어나가는 여자애. 녹음실에서 뛰쳐나오는 얼굴을 보니까 생각보다 더 어리구만. 진짜 화장실 가서 우는 거 아닐까. 좀 안쓰럽기도 하고. 종인은 그 뒷모습을 좀 시선으로 좇다가 다시 백현을 돌아봤다. 앉아. 금방 먼저 갈래? 좀 걸릴 것 같은데. 기다릴 수 있겠어? 빤히 훑어보자 백현이 의아한 듯 묻는다.

 

왜 그렇게 봐?”

그냥. 형이 참 낯설다 싶어서.”

? 뭐가.”

아니 그냥, 나는 맨날 웃는 것만 보니까.”

뭐야 너... 나한테 미안하냐?”

 

이런 때, 특유의 재치나 장난기로 편하게 대해주는 것은 늘 백현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백현이 끌어다준 의자에 순순히 앉아있자 손을 뻗은 백현이 뺨을 꼬집었다.

 

!”

 

이 인간이. 방금 종인은 진심으로 좀 발끈했다.

 

진짜 아픈데???”

아프라고 꼬집은 거 맞는데? 내가 너 좋아한다고 꼭 안 아프게 해줘야 된다는 법 있냐.”

 

또 좋아한다는 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뚱한 표정을 짓자 익살스럽게 웃는다. 못 당하겠다. 종인도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그냥 말았다. 어색해하는 걸 금세 알고 백현이 덤덤한 투로 덧붙인다. 그는 다시 사운드 키를 조절하고 있다.

 

조급하게 안 해. 조금 더 기다릴 테니까.”

“.......”

 

명분이 어찌됐든 이렇게나 자주 부대끼는데, 완전히 아무 일도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와 키스를 할 뻔한 적 있다. 결과적으로는 하지 않았다. 밖으로 좀 나가자는 백현의 손에 끌려 나가 전시를 관람하고, 식당에서 밥도 먹고, 그가 사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공원도 걸었던 날. 제가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었나 보았다. 동그랗고 노란 가로등 아래서.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그 벤치 옆에 약속이라도 한 듯 발걸음이 멈춰 섰을 때.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가 이쪽으로 기울었고, 종인은 손에 쥔 아이스크림콘을 꽉 쥐었다. 숨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몇 초가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결국엔 고개를 돌려 피했다.

 

미안. 근데 못하겠어.’

‘...그래.’

 

백현은 선선히 물러났지만, 그대로 시간을 같이 더 보낸다는 건 서로에게 고역이었다. 그렇게 물러선 그는 그 길로 종인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후론 다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치부했다.

 

아직 도훈을 다 잊지도 못했고, 죄책감이 목구멍까지 짓눌렀다. 아직 그를 잊게 할 만큼 충분한 계절이 지나지도 않았다. 세상에 이미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못 볼 거라고 취급해버리는 못돼먹은 짓을 하고 싶지도 않다. 과연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것도 백현과. 항상 답은 똑같았다. 정말, 가장 말도 안 되는 일이다.

 

 

 

 

 

4

 

보지 마.”

 

이른 저녁인데 불을 켜지 않아 어둑한 집에 성큼성큼 발을 들인 백현이 리모콘을 빼앗았다. 영상이 돌아가던 텔레비전 화면을 그대로 꺼버린다. 종인의 얼굴에 일렁거리던 브라운관의 푸른빛이 꺼졌다. 어두운 가운데도 알 수 있다. 홱 돌아보는 종인의 눈이 반항적이다.

 

왜 뺏는데? 이리 줘.”

이제 그만 해.”

뭘 그만해.”

“.......”

 

내일은 도훈의 기일이다. 두 번째 맞는. 시간이 약이라고, 최근의 종인은 컨디션이 꽤 괜찮은 편이었지만 피해갈 수 없는 날도 있다. 며칠 전부터 기분이 들쑥날쑥했다. 지난 연말쯤 꺼내 보았다 혼절할 만큼 울고 어딘가 구석에 밀어놓았던 영상을 다시 꺼냈다. 도훈과 자신이 담긴, 도훈의 웃는 얼굴이 많이 담긴 비디오. 이런 때의 종인은 자신 스스로도 조절할 수가 없다. 능숙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것도 더 이상한 거라고. 종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방어한다.

 

이제 그만하라니.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만 둘 수 있다는 게 더 이상하지. , 빨리. 내놔.”

“...뭐 좋을 게 있다고.”

좋은 거 없는 거 나도 알아. 근데 그게 맘대로 되냐구. 형은, 생각도 안 나냐? 그렇게... 친했으면서.”

나도 생각 나. 안 하려고 노력하는 거지. 너만 걜 잃은 게 아냐. 나도 친구를 잃었어. 그냥 버티는 거야.”

 

종인은 백현을 한참 노려봤다. 뭐가 맞는 말인지, 그런 거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은 듣고 싶지도 않고. 백현도 덤덤한 얼굴로 눈을 피하지도 않는다. 오기가 차올라 저도 모르게 입이 내뱉었다.

 

“.......”

애인이랑 친구는 달라.”

 

그런 얼굴 할 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해버렸다. 종인은 말을 잃은 백현의 손에서 리모콘을 빼앗았다.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질린다는 얼굴 할 줄 알았는데. 막상 마주하니 목구멍이 콱 좁아든다.

 

보고 싶은데...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빨개진 눈가를, 보고도 달래주지 않는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백현이 나가버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좀 미적대다가 어떻게라도 가겠지 싶어서 무작정 1층으로 나왔는데, 여전히 백현의 차가 주차장에 서있다. 좀 쭈뼛대다 가까이 다가가서 운전석을 들여다보니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다. 똑똑. 조심스럽게 창문을 두드렸다. . 작게 부르자 눈을 뜬다. 대답 없이 잠금을 푸는 소리에 눈치껏 돌아가서 조수석에 탔다. 그가 시동을 켜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켜 단지를 벗어날 때까지도 입이 안 떨어졌다. 종인은 손가락을 만지작대다 그의 옆얼굴을 힐끗 보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안 갔어? 형 화나서 간 줄 알았는데....”

오늘 강릉 간다며. 나 가면 어떻게 하게. 운전도 못 하면서.”

그건 그렇지....”

 

백현은 말없이 차를 몰았다. 좀 자던가. 10시는 돼야 도착할 거야. 조금 뒤에 심심한 투로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잠이 올 것 같진 않다. 도훈을 보러갈 때 별로 엄청 유쾌한 분위기로 간 적이야 없었지만 이렇게 조용히 간 적이 있었나. 도훈의 원래 집은 강원도다. 그의 가족들은 매장을 하는 주의였기 때문에 고향에 있는 가족의 묘 자리에 그를 묻었다. 당연히 백현이나 종인은 그에 대한 권리가 없었고. 딱히 현대식은 아니었다. 둘이 따로 도훈의 사진 몇 장과 조그만 물건 몇 개를 담은 작은 병을 동해바다에 띄웠다. 강릉에. 도훈은 늘 가기에 멀더라도 서해보다 동해가 좋다고 했으니. 되는 일이고 안 되는 일이고, 환경보호고 뭐 그런 건 그 때 종인의 안중에 없었다. 지금은 어디로 흘러가서 가라앉았는지, 부서지고 썩어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겠는 바다 위로 둥둥 떠가는 유리병을 보며 종인은 한참 목 놓아 울었다. 행여나 안 좋은 생각을 할까 종인의 팔만 잡은 백현은 어정쩡한 폼으로 내내 그 옆에 서있었다. 그 울음을 들으면서, 저를 잡지 않은 백현의 손이 몇 번이고 담배갑이 든 주머니를 쥐었다 놓았다 하는 걸 종인은 미처 몰랐다.

 

지금 다시 그 바다를 마주보고 앉아있다. 그 자리에서, 그 때보다 조금은 덜 거센 파도가 철썩철썩 사람도 없는 조용한 바닷가에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광경을 바라봤다. 무릎을 끌어안고 파도치는 걸 구경하던 종인은 운동화를 신은 발을 움직여 모래를 살살 밀어냈다. 그러다 고민 끝에 살짝 고개를 틀어 옆에 앉은 백현을 돌아 봤다.

 

고마워. 그 때... 다 해주고.”

 

언젠가 한 번은 얘기 하고 싶긴 했었다. 너무 늦었나. 종인의 생각보단 그래도 조금 빠른 것 같기도 하고. 그 때,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하고 꿋꿋하게. 누구보다 듬직하게 그를 보내줬던 백현.

 

너 좋으라고 한 거 아닌데.”

 

백현은 저를 쳐다보지 않는다. 여전히 끝이 없는 바다 저 끝을 보고 있다. 종인은 여전히 제가 자라지 못하고 무릎 사이에 턱을 괴고 어린애 같은 자세나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 때문에 한 거야.”

“.......”

우리 엄마는 일하잖아. 그래서 어머니가 나 밥도 챙겨주시고. 그랬어. 내 책상보다 도훈이 책상에서 공부한 적이 더 많아.”

 

백현이 아까부터 담배갑만 만지작대고 있었다는 걸, 이제는 모르지 않는다.

 

그래. 니 말대로, 분명 연인이랑 친구는 다른 거겠지만. 내가 그 녀석이랑 함께 한 시간의 밀도가 낮진 않다고.”

“...알아. 미안.”

 

작게 웅얼거린 사과에 슬쩍 이쪽을 돌아보는 백현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희미하게 웃었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는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펴도 돼, 담배. 하고 덧붙였을 때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 그제야 종인은 안도한다. 그렇게 백현 쪽에서 먼저 외로운 얼굴을 해버리면, 정말 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 것 같아서.

 

 

 

 

 

이불이 부스럭거린다. 종인은 한참을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렸다. 뼈가 시릴 정도로 외로웠다. 이런 밤이면 가슴 한 가운데가 막힌 것처럼 먹먹해서 잠들 수가 없다. 등 뒤에서 백현이 작게 한숨을 쉰다. 이렇게 스케줄상 하룻밤 자고 올라갈 수밖에 없는 날이면 백현은 트윈 베드룸을 예약해 놨다. 그게 아니더라도 더블베드의 끄트머리에 비스듬히 상체를 세우고 누워 나머지 공간을 종인이 쓰도록 내버려뒀다. 백현은 이런 날 잘 잠에 들지 않는다.

 

이리 와.”

“.......”

 

가까이 오라는 말에 종인은 조금 망설였다. 당장이라도 옆으로 가고 싶지만, 염치없고, 두려웠다. 그래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백현에게 등을 돌리고 따로 누워, 혼자 울음을 꾹꾹 삼켜야만 하는 밤은. 그가 옆에 없는 것보다도 더 외로워서.

 

약간의 고민 끝에 냉큼 베개도 없이 좁은 싱글 침대를 파고들면 이불을 들어 틈을 내준다. 쑥 이불 안으로 들어가자 백현의 손이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고 어깨를 둥글게 감싸 안는다. 종인이 작은 몸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팔베개를 한 팔과 품에 폭 와서 안긴다. 몸을 웅크리고 들어온 종인의 동그란 머리통 위로 턱을 얹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좀 멀리하고 싶은데, 이렇게 안 도와주냐.”

“.......”

도 닦는 심정인 거 알면서.”

 

종인이 가슴팍에 뺨을 대고 안기면 이렇게 높이가 딱 알맞았다. 어차피 종인은 조금 뒤에 울음이 멎으면 스륵 잠이 들 테고, 백현은 이대로 밤을 꼴딱 지새워야할 테다. 이렇게 안성맞춤인데, 처음부터 연인이면 안 됐었나. 우리는. 빛 그림자가 어릿한 천장을 보며, 그런 나쁜 생각을 한다. 그렇게 말하면, 네가 나를 경멸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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